<왕이 된 남자>의 이번 주 회차는 충신이 왕에게 독주를 먹인 뒤 죽어가는 왕 앞에 절을 올리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마무리되었다.
8회까지의 이야기가 이 장면의 정당성을 위해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자 시절 백성들이 다 함께 잘 사는 대동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 왕은 가족사의 트라우마와 정적들의 위협을 감당하지 못하고, 약물에 쩔어 폭정을 일삼는 심신미약 환자로 변한다.
왕과 외모가 똑같은 젊은 광대에게서 성군의 자질을 발견한 충신은, 왕을 독살하고 가짜 왕을 내세운 뒤 동료들과 함께 대동세상을 구현하기로 선택한다.
영화 <광해>에서 모티브를 빌려온 이 드라마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현대 정치사의 중대 사건을 역사적 상상력 속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진보 정치 세력과 뜻있는 백성들이 정점의 권력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끌어내리는 과정을 불가피하고 충정 어린 고뇌로 묘사한다.
특히 젊은 왕을 자멸하게 만든 사건이 어린 동생을 정적으로 보고 살해한 정신적 후유증 때문이라는 점은, 세월호 사건이 정권의 몰락에 끼친 영향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핵심 관심사는 탄핵 이후의 정치 상황인 것 같다.
새롭게 내세워진 왕은 정치 세력에 의해 그 실체를 끊임없이 의심받게 될 것이며, 무력한 충신에서 강력한 역적이 된 인물 역시 총공세에 직면할 것이다.
이들은 권위와 성과를 만들어낼 권력이 될 것이냐, 정당성을 의심받으며 몰락할 것이냐 하는 절대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이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세력은 두 그룹으로 묘사된다. 하나는 돈과 권력을 탐욕하는 전형적인 세력인데, 오늘날의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결합한 이익 집단을 연상시킨다. 다른 하나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몰락한 세력으로 이들은 정서적인 정당성을 호소한다는 점에서 태극기 부대의 비장미와 유사해 보인다.
앞으로 남은 회차에서는 아마도 이 드라마의 창작 주체들이 현재의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과감한 상상력으로 펼쳐질 거라는 예상을 한다.
어차피 이 드라마의 전반부 또한 리얼리티와는 거리가 꽤 멀었다. 단순히 소재 차원 뿐만 아니라, 대본과 연출의 짜임새 면에서 그 간극을 메우기가 버거워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는 한 편의 대중 문화가 완성도와는 상관 없이 강렬한 시대 정신을 내뿜는 경우가 있다.
2019년의 시점에 방영되고 있는 이 드라마를 통해 나는 세상의 기류를 읽는다.
1인 2역을 소화하고 있는 여진구는 무르익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이 정도 기량의 젊은 배우가 깊이 있게 성숙해간다면 장차 어떤 경지를 보여주게 될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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