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응은 치유가로서 눈여겨 볼 만한 현상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직도 눈물이 난다, 상황을 상상하면 내가 힘이 든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등의 반응인데 반해, 보수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스스로 꾸준히 언급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비정한 말을 반복한다는 특징이 있다.
최근에는 "문재인이 이순신보다 낫다. 세월호 한 척으로 정권을 찬탈했으니까"라는 말이 회자되었고,
진영 내부에서 "옳은 말"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역설적이지만 보수 진영 또한 극심한 세월호 트라우마를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심리 기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월호는 사건 자체의 본질적 비극성도 클 뿐더러, 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재난 사고와는 아주 다른 특징이 있다.
전 국민이 사건의 고통을 심리적으로 생생히 경험한 당사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그 후유증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규모나 강도 면에서 비슷한 다른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6.25 전쟁이나 일제 강점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더 유사하리라고 본다.
1. 머물러 있는 사람들
개인이든 사회든 극심한 충격을 겪고 나면 감정적으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오래도록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당시의 감정과 심리 상태 또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몇 십 년전의 일도 어제 일처럼 끊임없이 되뇌이며, 그 기억에 비추어 현재를 해석한다.
삶이 과거의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것이다.
예컨대 6.25 세대는 최근의 새로운 기류에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북한을 평화적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자는 것은 주사파가 나라를 들어바치려는 술수라고 느껴지며, 과거에 미국이 참전해서 상황을 주도했듯이 지금도 그래주어야만 살 길이 열린다고 믿는다.
이런 논리 구조가 당사자들의 심리 속에서는 진심이다.
다만 현실을 객관화 하고 미래를 설계할 능력은 떨어진다.
관점 전환이 어렵기 때문이다.
2.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됐다, 할 만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성적이고 쿨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온전한 과정 없이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묻어둘 뿐이다.
잠재 의식에 묻혀 있는 것들은 늘 윙윙거리며 의식 바깥으로 떠오르려 한다.
치유가들은 이런 현상을 "내 집 지하실에서 수백 킬로그램 짜리 고릴라가 밤마다 쿵쾅거린다"고 비유한다.
이런 것들을 눌러두기 위해서는 매우 강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고,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감정을 마비시키는 무감각apathy 상태로 만들 뿐이다.
무감각은 일종의 방어벽이므로 언제든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무너지면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정신분석학과 치유학의 대전제이다.
스토아 철학자들 또한 감정을 마스터 하는 것이 철학의 본령이라고 말했다.
스토아 철학이 금욕주의라고 해석하는 오늘날의 흔한 오해와 달리, 제논이나 에픽테투스 같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해소하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는 데 주력했다.
단순히 감정을 억누르면 그것들이 되돌아 왔을 때 더욱 허둥댈 뿐이라고 염려하며, 감정 다루는 법을 마스터하는 것emotional mastery이 높은 수준의 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이성적이거나 지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가해자의 신원과 가해의 내용이 명확하게 적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처벌이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을 일으켜 치유하는 과정에 긴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이러저러 해서 이런 일을 겪는가?"라는 혼란과 자기 의심,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용서하지 않겠어"라는 분노의 악순환을 멈출 수가 없다.
가해자가 진실된 사과를 하는 것이 서로가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길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피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종용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경우든 치유가는 상처의 본질을 공유하고 충분히 공감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 바탕 위에서 당사자는 애도와 비탄의 과정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허용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상처에서 벗어나 일어날 수 있다.
3. 회피하고 도망가는 사람들
치유란 내면을 전환함으로써 외부 현실을 바꾸는 작업이다.
이는 고도의 숙련을 필요로 하는 매우 지적이고 강력한 작업이다.
물론 이 순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정반대의 세계관도 있지만,
치유가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순서를 결코 헷갈리지 않는다.
그 첫 걸음은 당연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결의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고통스럽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어진다.
직시하지 않고 피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 부인하는 것denial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믿게 된다.
외부의 요인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흔하다.
이런 심리를 투사projection라고 부르는데,
상황을 복합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이 어려워지므로 유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이를테면 세월호 사건은 현재의 민주당 정권을 성립시키는 데 하나의 원동력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 정부와 보수 진영이 자기를 들여다 볼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정치 세력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전환시키는 작업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어렵겠지만,
이 작업을 소홀히 하고 "외부의 악"을 비난하는 데 주력한다면 "낡은 세력"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특히 "권력을 찬탈 당했다"는 말은 "원래 권력은 내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이것은 트라우마 증후군 중에서 분노 현상이다.
분노는 3단계의 메카니즘으로 형성된다.
- 네가 나를 부당하게 대우했어
- 나는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 너도 내가 당한 것을 똑같이 겪어봐야 해.
보수 진영의 댓글이나 유튜브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똑같은 과정을 겪을 거라고 믿고 소망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신 연령이 어떻다느니, 외교 망신을 시킨다느니, 탄핵을 당해 감옥에 갈 거라느니 하며
자신들이 겪은 그대로를 되돌려 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분노 메카니즘이다.
이러한 심리 자체는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정치 공학으로까지 끌고 온다면 보수 정치인들 스스로가 트라우마에 잡혀 있음을 반증할 뿐이다.
상처입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을 리드할 수는 없다.
상처입은 사람은 타인을 상처줄 뿐이다.
스스로를 치유한 사람은 더 많은 타인을 치유한다.
보수 진영의 트라우마
댓글을 통해 양식있는 보수 시민들의 반응을 접할 수 있다.
"세월호의 인간적인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현 정권은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권력을 잡고 아직도 우려먹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라는 표현에서 나는 그 분들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상처는 정치나 경제의 프레임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상처란 어떤 류의 에너지이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는 우리의 몸과 감정, 정신, 정체성 안에 유령처럼 어른거리며,
개인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집단 의식을 휘몰아치게 한다.
그 힘이 사회와 역사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세월호에 대해 정치적인 악용을 멈추라고 요구하거나 돈으로 충분히 보상했으니 그만 하라는 말은, 그것이 설혹 사실일지라도 보수 진영 스스로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백 년도 더 지난 동학혁명이 끊임없이 소환되고,
7, 80년도 더 지난 일제시대와 6.25가 여전히 우리의 심리와 현실을 지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처는 의식적으로 해소시키지 않는 한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원치 않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21세기 대한민국은 치유가 대중화 하고 전 세계에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우 트렌디한 사회로 변모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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