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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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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 세상

진보와 보수의 스타일 - 김태호 vs 나영석

HaloKim 2019. 8. 27. 00:58

<무한도전>은 현존하는 예능의 기반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10년 동안 온갖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포맷을 창조하던 <무한도전>은 지치고 고갈되면서 종료했다.


<1박 2일>은 초기 <무한도전>의 어떤 아이디어와 틀 하나를 차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훌륭한 모방자가 갈고 닦아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최대의 단일 프로그램의 지위를 누렸다.


각각 김태호 PD, 나영석 PD가 중심에 있었다.


KBS를 떠난 나영석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tvn에 자리를 잡고 확장적인 팀 플레이를 선보인다.

<1박 2일> 시절에 터득한 핵심 소재인 음식과 여행이라는 큰 틀 위에서, 

인물과 공간을 변주하고, 소재를 융합하고, 후배들을 키워냄으로써 하나의 예능 생태계를 구축했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점점 성숙해지며

공간과 사물을 담아내는 유려한 솜씨는 장인의 경지에 접근하고 있다.


새로움이라는 게 사소해서 때로는 지루하지만, 

일단 그 세계에 발을 담그면 거기에 녹아든 인간미와 품격에 동화되어

내 가슴이 따뜻해지고 삶에 대한 낙관이 샘솟는다.


<무한도전> 이후의 김태호는 MBC의 핵심 예능을 진두지휘 하는 수장으로 돌아왔다.

두 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두 가지 장기를 펼쳐 보인다.


토요일의 <놀면 뭐하니>는 그가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을 철학적, 거시적으로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유투브 전성시대를 보며 김태호는 카메라를 가진 촬영 주체/ 거기에 찍히는 피사체/ 그것을 관람하는 시청자라는 전통 미디어의 틀이 허물어졌음을 인식한 것 같다.

 

그래서 단지 유투브를 드나드는 방식을 뛰어넘어, 내용과 형식 전체의 혁신성과 철학을 자기 프로그램 안으로 끌고 왔다.

카메라를 툭 던져놓고, "아무나"가 찍어온 컨텐츠를, 유재석이라는 예능 거물이 시청자로서 품평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프로그램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창작자와 관람자의 지위까지 역전되는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재미가 없고 거칠다. 심지어 뭘 하자는지 모를 정도다.

형식의 새로움을 채울 만한 내용과 내공이 아직 빈약하고, 창작 주체들의 숙련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무한도전> 시절의 김태호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김태호가 MBC 예능국을 또 다시 십 년간 먹여살릴 만한 혁명을 감행하고 있다는 촉이 왔다.

그는 이 틀을 가지고 끈질기게 실험하고 성장시킬 것이다.


무모하지만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혁신성, 

혼돈 속에서 움직이는 숨은 법칙을 찾아내는 통찰력, 

그것을 새로운 형식으로 세팅하는 창조력,

이것을 모두 갖춘 트렌드 세터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고 키워진다.


혁신의 위험성을 익히 아는 김태호는 일요일의 <같이 펀딩>을 통해 안전한 확장을 병행한다.

<무한도전> 시절에도 사회적 가치, 진보적인 태도를 예능 안에 수시로 불러들이곤 했으므로 이것은 김태호가 아주 쉽게, 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주제를 특화 시키면서, 활동 주체는 폭넓은 연예계와 시민 사회의 결합으로 확장하되, 

형식 자체는 숙련된 제작진이 안전하게 끌고 나간다.

백초월 스님의 독립 운동 이야기에 태극기 보급 운동을 얹어 배우 유준상이 주도하는 첫 편이 깨끗한 안타를 날렸다.

노홍철이 주도하는 두번째 프로젝트는 공동체의 복원 운동과 치유를 예능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두 명의 예능 거장을 통해 삶과 사회를 창조하는 두 개의 스타일을 본다.

내 기준으로 말하자면 김태호는 진보주의, 나영석은 보수주의다.


기질적으로 나는 김태호 스타일을 사랑하며 흥미진진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늘 재미있거나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나에게 나영석은 좀 지루하다.

그러나 그에게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일상을 사는 삶의 기술을 더 많이 배운다.

나영석 스타일이 없이는 세상이 유려하게 굴러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두 사람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꾸준히 성실하게 자기 삶에 뿌리내리고,

입으로 표방한 것을 발걸음으로 이뤄나감으로써 주위에 책임을 진다.


노자 말하기를, 큰 일 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생선 굽듯이 매일의 일상에 계속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 가지 다른 스타일이 예능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한국의 대중문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의 성숙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