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X가 암살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디로 향했을까.
1950~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의 뜨거운 심장과 같던 그는,
흑인이 원래 아름답고 뛰어나며 인류의 뿌리라고 주장하면서,
백인을 악이라고 규정했다.
이 과격한 이분법에 실망하고 오래 전에 흥미를 잃었던 나는
최근에 한 미국인 클라이언트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을 계기로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의 원래 성은 리틀Little이다.
노예제 시절 붙였을 법한 이런 식의 정체성을 180도 뒤집어버리는 것이 말콤의 목표였다.
흑인의 권익을 옹호했던 아버지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고 어머니가 신경쇠약으로 무너지자 말콤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것이 자기에게 아무런 미래를 가져다 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십대 소년은
뉴욕의 할렘가로 흘러들어 범죄 현장을 전전하다 감옥에 갇힌다.
감옥 안에서 만난 멘토를 통해 사회 구조에 눈을 뜨면서 그는 흑인 무슬림이 된다.
그 길을 열어준 것이 이슬람 종교 단체였기 때문이다.
출옥 후 말콤은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특징은 백인들이 사용하던 선악과 미추, 우열의 이분법을 그대로 가져다가
흑인과 백인에게 정반대로 뒤집어 적용시켰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세련된 관점으로 보기에 흑인이 우월하다는 것은 상상적 정체성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백인이 타 인종에 비해 우월하고 선하다는 것도 상상적 정체성이고,
인간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고자 그런 아이디어를 신념과 제도로 만든 미국 역사의 비극일 뿐이다.
말하자면 말콤 X는 어처구니 없는 이분법을 가져와서 어처구니 없는 이분법을 들이받은 것이다.
또한 인권 운동을 온건한 방식으로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조롱하고 거부했다.
이것이 오랫동안 비통함에 숨 죽이던 흑인들의 가슴과 영혼에 불꽃을 피워 올렸고,
말콤 X가 몸담은 종교 단체 회원이 몇 백명에서 몇 만명으로 늘었다.
그의 카리스마와 말솜씨, 큰 키에 깔끔한 외모 또한 큰 몫을 했다.
뉴욕에서 흑인들이 경찰의 폭행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콤이 찾아가 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는데,경찰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흑인들이 경찰서 주변에 속속 집결해서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말콤이 수신호를 하자 모두가 조용히 사라졌다.
30대 초반의 말콤은 더욱 더 미디어와 FBI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론은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유죄인 사람을 무혐의로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권력이다."
1960년대 초반이 되자 말콤 X는 단체 지도자인 엘리야 모하메드에게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슬람의 메카로 성지 순례를 떠나고 국제적인 지도자들과 대화하며 생각의 폭을 넓혀간 그는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했고, 1964년에 소속 단체와 결별했다.
1965년 2월, 39세가 되던 해 뉴욕 맨해탄에서 수십 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모하메드 진영의 사주, 그리고 FBI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말콤을 잘 아는 이들은 이렇게 추도했다.
"당신들은 그의 미소와 따뜻한 가슴, 내적 통합성을 알아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로 성숙해갈 수 있었던 인물을 잃었다."
나는 역사가 어떻게 승리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미국의 인권 사상이 성장하는 데에 흑인 인권 운동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역사적 과제를 헤쳐나간 상징적인 인물이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이다.
두 사람의 성향과 스타일이 달랐다.
마틴 루터 킹은 보스턴 대학의 철학박사 출신으로 196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생전에 말콤과 교류가 없었던 MLK은 말콤을 추모하면서 "증오의 시대가 만들어낸 증오"라는 표현을 썼다.
그 역시 몇 년 후 39세의 나이에 극우파 백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어쩌면 영혼의 짝인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같은 과제를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고 같은 방식의 종결을 맞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연설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은 오늘날 전 세계 인권 운동에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되었다.
그 역동적인 시대의 쌍두마차이자 그림자 취급을 받은 말콤 X가 오늘의 내게는 왠지 애틋하게 다가온다.
윤회라는 것이 있고 창조주의 섭리가 있다면,
지금 말콤 X의 영혼이 어떤 여정을 걷고 있을지,
아름다운 상상을 하며 축복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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