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Joy
수행자/영성가들은 존재의 순수한 상태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 탐색과 경험에 대한 리포트를 종합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공하다, 텅 비어 있다, 평화롭다, 나/주체가 사라진 상태, 하나됨, 순탄히 저절로 이루어짐, 지복감 등이다.
또한 기쁨joy을 말하기도 한다.
나를 돌이켜 바라보면, 감정의 진폭이 작아졌다.
여러 감정의 속성들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싸이클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진폭이 완만하고 예전에 비해 미미하다.
그런 것들이 불편하기보다는, 대개의 경우 내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정보 전달 수단이 된다.
뭔가 깝깝하고 우울해질 때 그 감정을 가만히 응시해보면 화가 난다, 섭섭하다, 가 핵심이다.
"아, 그랬어? 속상할 만 하네. 아휴~ 그 사람이 너무 머리 썼어."
이렇게 알아주면 금새 평화가 돌아오고, 내 마음 속에서 일의 실마리가 촥촥 풀려나간다.
치실을 쓰다가 잇몸을 세게 치는 바람에 기분이 싸해졌다.
"아이고, 다쳐쪄요? 아포? 세상에!"
나 혼자 이렇게 말하자 아픈 게 금새 사라졌다.
그리고 무심결에 기쁨이 올라온다.
"무심결에"가 핵심이다.
그런 상태는 애써서 명상하고 자각할 때보다는, 사소한 일에 무심히 몰두하고 있을 때 쉽게 얻어진다.
그 허접하고 귀찮은 일들을 무심히 정성스레 하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룰룰루~ 노래를 부르며 엉덩이 깨춤을 추는 것이다.
2. Compassion
서양 영성가들이 오늘날 자비를 mercy보다 공감compaassion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 철학을 제대로 이해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mercy는 "네가 뭔가 잘못을 했고 모자라지만 내가 관용을 베풀어 용서할께" 라는 뉘앙스를 풍긴다면
compassion은 함께 느끼고 일치감을 표현한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위대한 공감great compassion 혹은 마하 카루나maha karuna로 번역하는 것이다.
나는 대자대비라는 말에서 끊임없는 영감을 얻는다.
자비慈悲는 참으로 절묘한 글자 결합이다.
어질고 온화한 사랑을 뜻하는 자. 이것은 강렬하고 낭만적인 사랑이나 열정적인 구원자의 태도와 다르다.
여기에 슬픔을 뜻하는 비가 붙으니, 뭔가 잘못되어서 큰 일 났다고 애간장이 녹도록 난리친다기보다, 그렇게 울고 불고 하는 세상 사람의 목소리를 사랑을 가지고 가만히 바라보는(관세음) 내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다.
관음보살/보디사트바의 경지, 마스터/대천사의 경지에 이르면 슬픔이 사라지고 엉덩이 깨춤을 추는 지복감과 환희심만 넘치는 게 아니라, 은은한 사랑과 보는 내 마음이 아픈 상태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대자대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이 존재계를 한없이 바라보며 돕는 이들의 의식이 어떻게 오직 환희심이 넘치며, 오직 공함에 머무르며, 뭐가 좋다고 맨날 엉덩이 깨춤을 추겠는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에고질을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신들도 그런 여정을 거쳐 성장했을 것이기에 분별함 없이 공감하며, 오직 자신의 의식과 조화로움을 북돋아 성장의 판 자체에 빛을 키워나가는 끝없는 과정이 그 분들의 성장 여정일 것이다.
그 성숙한 compassion이 순진무구한 joy를 확장시킬 것이다.
또한 부처님만 이 상태를 넘어서서 완전히 초월계/해탈계로 가셨고 오직 무로 존재한다, 아무 것도 없는 순수 무라는 생각도 만고에 내 상상일 뿐이다.
그 존재/의식체가 어떻게 현존하시는지는 모른다고 말해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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