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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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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로의 치유와 성장

치유 일기 -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하여

HaloKim 2020. 3. 22. 17:09

흔히 외로움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 어떤 동일체unit entity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느낌이다.


그것은 평화와 공의 공간인 동시에, 무언가 끊임없이 이해하고 허용하며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나의 경우 슬픔이라고 느낀다.


삶에 대한 이 미세한 서걱거림은 정확하게는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그 인식이 확장의 원동력이자 메카니즘이다.


이 느낌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영원히 성장할 것이므로.


아마도 관음보살께서 말씀하신 대자대비는 단지 지구에 대한 자비와 연민일 뿐만 아니라,

존재계 전체에 대한 감수성인지도 모른다.


외로움, 슬픔, 서걱거림을 문제삼을 필요 없다는 깊은 위로.

그것을 더 깊이 알 때, 자신의 역할에 대한 긴장이 덜하고 유려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등장이 때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준다.

모든 측면에서 내가 도달한 그 무엇에 대한 확인.


그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관계란 타인이 나에게 고정된 의미를 갖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잠재된 싹이 트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나의 두려움 때문이다.

벌어지는 모든 일의 원리에는 예외가 없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myself.


myself라는 말은 오묘하다.

나 자신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가 창조주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지상의 여정은 자신이 창조주임을 깨우쳐가는 것이다.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자신이 창조주임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같다.


요즘 시절에 이 말은 오독의 위험성이 크다.

그러나 요즘 시절이 무엇을 위한 상황인가?


창조주에 대한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상황이다.

모두가 창조주라는 것, 그것을 말하고 설득하는 방식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


전광훈 목사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자신이 하나님과 친구라고.

단, 그는 덧붙였어야 했다. "당신들도 그러하다"고.


이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회피가 

종교 내부와 종교를 둘러싼 인식의 도착을 낳는다.


내 안에 다시 한번 사이비 공포, 역사적인 마녀사냥 트라우마, 개인적인 자존감 트라우마가 활성화 된다.

오늘 이것을 다시 깨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