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은 영혼의 시詩다.
삶은 자기만의 시어가 드러나는 것이다.
종교는 시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기독교와 불교를 창시하지 않으셨다.
그 분들은 위대한 시어를 말씀하셨다.
종교는 해석자들이 창시한 것이다.
해석의 폭력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그렇다고 종교 자체를 통째로 경멸한다면 영혼의 별을 잃을 것이다.
영성, 형이상학, 진리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나는 종교들을 통해 시를 접했고 해석을 배웠다.
그러나 나의 시를 나의 맨 얼굴로 만나고 싶다.
누군가가 틀렸다고 말해도, 심지어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내가 사랑하는 시가 있었다.
한 구절에 밑줄을 긋고 그 뜻이 무엇이냐는 시험 문제가 나왔다.
나는 선생님이 알려준 답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답을 골랐고 점수가 감점되었다.
모든 진리는 형이상학이다.
고정된, 객관적 진리란 없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근대 과학주의가 물질이란 이런 것이라고 기고만장하게 선포하며,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마치 이단 심문Inquisition하는 중세 사제처럼 거만한 얼굴로 노려보았을 때,
그 스스로가 양자물리학에 밀리고 포섭당하는 진리의 한 조각 신세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근대 과학주의자들의 지성과 역사적 공로를 인정한다.
나는 양자물리학을 통하여 비로서 형이상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자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인, 신비가의 글과 말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덕분에 그토록 복잡한 상념을 불러 일으키던 예수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었고,
마치 친절한 남의 아버지처럼 데면데면 하던 부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이윽고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시어들을 해석하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진리는 맨 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시처럼 상징으로 드러난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
사소한 일상을 비로소 열심히 산다.
예전에는 열심히 살아야 하는 팔자라 억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았기에 열심히 살기 싫었다.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은 열심히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삶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고, 죽는 것도 별 일이 아니었다.
딱 한 가지만 경험하고 정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소히, 부지런히 산다.
억울할 것도 없고 의문도 없기 때문이다.
문득 공자의 논어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朝聞道夕死可矣 (조문도 석사가의)를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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