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저의 견해는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너보다-더-잘-알아 철학"을 내려놓고 사랑과 감사의 에너지/의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의 에너지에 충실하다면 어떠한 양육이나 훈육도 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양육자 자신의 공포와 불안을 투사한 강박 관념을 사랑과 돌봄이라고 기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인간 존재의 본질이 육체 그 자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유독 어린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있어서는 육체의 크기가 절대 기준입니다.
나이 먹고 덩치 큰 성인이 이래라 저래라 가르쳐야 한다는 태도가 철저히 깔려 있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작은 성취와 삶의 모험을 축하하기 보다는 "에이그"라며 돌봄의 탈을 쓰고 그들이 성장하는 모든 순간을 실패와 부족으로 규정합니다.
지금의 제도 교육이 실효를 다했음을 모두가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너의 인생은 실패하고 말거야"라며 그 가혹한 시스템 안으로 등을 떠밉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무관심하지요.
달래서 어찌됐든 그것을 수행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 비명이 아이들간의 폭력을 낳고, 멀쩡하게 보이는 어른들이 은밀히 세상에 복수합니다.
자신의 내면아이가 숨막혀 질식해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현실의 아이들을 괴롭히며, 주위 사람들에게 학대적인 갑질을 행하며, 인류를 전쟁과 착취에 몰아넣는 무감각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대학교는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미래의 아이들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들의 다수가 선택하면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살아남을 것이요,
그들의 다수가 거부한다면 무너질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벌어먹고 살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의 개념에 대한 기만, 풍요의 개념에 대한 기만을 그 아이들이 깨트릴 것입니다.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할 필요없이 모두가 조금씩 나눠서 해도 다들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자원이나 물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어지간히 똑바로 쓰기만 해도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으며,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움켜쥐고 통제하는 극소수의 손을 바라보기만 해도 거짓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노동의 본질은 창조적 유희로 변모할 것입니다.
더 큰 물질을 창조하는 경험을 하든
더 큰 사랑이나 예술, 치유를 창조하는 경험을 하든
무기력하게 돌봄을 받는 경험을 하든,
그 어떤 가치도 조롱받지 않으며,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선택대로 누리고 돌봄받으며 창조하는 경험을 통해 성장할 것입니다.
그 첫번째 세대가 되는 아이들의 고통이 있겠지만,
모든 세대가 자신들만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짐짓 고통받으며 성장했듯이,
그들 또한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할 말은 아마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것 뿐인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현명해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가 더 잘 알아서 누군가를 교육/양육/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자 되기라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 위기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중입니다.
같은 제목의 첫번째 포스팅에서 인용했듯이, "교육이란 아이들의 존재 그 자체를 알아가는 것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누군가를 교육시킨다는 것이 그 존재 본연의 결을 넘어설 때 그것은 자칫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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