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중 페친이신 유택주 선생님의 권유와 작성해두신 블로그를 통해서 <복성서>를 알게 되었다.
소감은 한 마디로 말해, 기쁘다.
내가 서 있는 길을 다시한번 긍정하는 힘!
그 이유는 유 선생님의 글 두 편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신의 종복"이라는 표현에 표피적인 의문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전체 사상과 취지를 보면 신인합일, 즉 자신의 본성대로 함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다, 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선생님 본인도 다른 글에서 분명히 그런 뜻을 적어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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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 1절 -1. 참나와 에고의 작용, 관계, 본질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은 참나 때문입니다. 사람의 참나가 흐려지는 것은 에고 때문입니다.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좋아함, 싫어함, 욕망의 일곱 감정은 모두 에고가 만드는 것입니다. 에고로 이미 어두워져 참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니 참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일곱가지 감정이 돌아가며 찾아오기 때문에 참나로 채워지지 못한 것입니다. (人之所以爲聖人也者, 性也. 人之所以惑其性者, 情也. 喜怒哀懼愛惡欲七者, 皆情之所爲也. 情旣昏, 性斯匿矣, 非性之過也. 七者循環而交來, 故性不能充也.)
그것은 물이 흐려지면 그 흐름이 맑지 못하고 연기가 나면 불빛이 밝지 못한 것과 같아서 물이나 불의 성질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모래로 흐리지 않으면 물이 맑고 연기가 나지 않으면 불꽃이 자연히 밝은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사람의 에고가 작동하지 않으면 참나는 저절로 충만할 것입니다. (水之渾也, 其流不淸. 火之煙也, 其光不明. 非水火淸明之過. 沙不渾, 流斯淸矣, 煙不鬱, 光斯明矣. 情不作, 性斯充矣.)
자습노트)
이고(李翺 ; 772~841)는 당나라 때 유학자로 한유와 더불어 불교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신유학을 창설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제가 복성서에 주목하는 이유는 호킨스 방하착의 근거가 되는 생각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부정적 감정이 참나의 완전한 실현인 깨달음에 장애가 되고 여러가지 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호킨스 박사의 생각입니다.
마침 중국 사람이 주석을 붙인 게 있어서 자습 겸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1절에 책 전체의 주제가 거의 드러나 있고 情을 에고, 性을 참나로 번역하면 호킨스 박사의 '에고 소멸, 참나 실현'과 같은 통찰이라고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가운데 거론하는 즐거움 대신 두려움이 오기 때문에 훨씬 에고의 부정적 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절 - 2
참나와 에고는 서로 의존합니다. 참나가 없으면 에고는 있을 수 없으니 참나가 에고를 낳는 것입니다. 에고는 홀로 에고인 것이 아니라 참나가 낳는 것이고 참나는 홀로 참나가 아니라 에고의 어둠이 있어 밝음이 드러납니다. 참나는 하늘의 뜻이 드러남이니 성인은 그것을 얻어 흔들림이 없으며, 에고는 참나가 움직이는 것인데 범인은 거기에 빠지고 집착하여 그 기원을 알지 못합니다. (性與情, 不相無也. 雖然, 無性則情無所生矣. 是情由性而生. 情不自情, 因性而情. 性不自性, 由情以明. 性者, 天之命也. 聖人得之而不惑者也. 情者, 性之動也. 百姓溺之而不能知其本者也.)
성인에게 어찌 에고가 없습니까? 성인은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가지 않아도 도달하며 말없는 가운데 신령하고 과시하지 않아도 빛나서, 우주에 맞게 일하며 음양에 맞추어 변화하니 에고가 있어도 거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범인에게 참나가 없습니까? 범인의 참나는 성인의 참나와 다르지 않지만 에고가 어두워져 차례로 지배하기를 그치지 않아 죽을 때가 되어도 참나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聖人者, 豈其無情邪. 聖人者, 寂然不動. 不往而到, 不言而神, 不耀而光, 制作參乎天地變化. 合乎陰陽. 雖有情也, 未嘗有情也. 然則百姓者, 豈其無性者邪. 百姓之性與聖人之性弗差也. 雖然, 情之所昏, 交相攻伐. 未始有窮. 故雖終身而不自賭其性焉.)
자습노트)
'참나는 하늘의 뜻(性者, 天之命)'이라 함은 중용 1장에서 온 말로 유교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늘의 뜻을 가장 존엄하게 여기고 거기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모든 위대한 영성의 실천과제입니다.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렵다는 구실로 그보다 못한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 세속화 내지 통속이며 우상숭배라고 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에서 세상 질서가 구축되는 것이고 거기에는 반드시 한계와 실패 또는 권태와 타락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내면에 존재하는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천명과 순명을 가장 중시하는 유교 영성이나 신의 뜻을 완전히 수용하여 신의 종복이 되고자 하는 기독교 영성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출처: https://tjryu.tistory.com/entry/1절-참나와-에고의-작용-관계-본질?category=517594 [생명과 환상]
출처: https://tjryu.tistory.com/entry/1절-계속?category=517594 [생명과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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