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턱대고 어떤 한 시대에 빠져드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18세기 조선 정조 시대가 그랬고, 19세기 말 러시아가 두 번째였다.
물론 개별적인 것에 일시적으로 꽂히는 경험은 그보다 여러 번이다.
어떤 음악에서 스페인의 정서를 감지했을 때는 일 년 내내 하루 종일 그 CD만 틀었으니 족히 천 번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조선과 19세기 러시아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통째로, 전반적으로 관심이 갔다.
혼자 오랜 시간 이리저리 관심을 기울이고 즐기는 동안, 어떤 단서를 접할 때마다 논리나 지식 너머의 분위기와 감수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곤 했다.
이제 세번째 관심 시대가 생겼다. <미스터 션샤인>이 다룬 구한말과 대한제국이다.
물론 나는 대학 전공이 한국사이고 대학원에서도 근현대사에 관한 공부를 집중적으로 한 편이다. 그러나 이성과 지식, 정의감 등을 넘어서서 그 시대를 감성적으로 음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스터 션샤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드라마가 종영되고 나서 내 감상을 한 번쯤 글로 정리해 볼 요량이었으나, 이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그렇게 마무리 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취미 생활 하듯이 <미션> 24부작을 짬짬이 돌려 보면서, 나는 불현듯 톨스토이를 떠올렸다.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의 서사적 멜로 속에 형상화된 제정 러시아와 혁명의 기운들.
그 격동의 시기를 묘사해낸 작가는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 속에서 짐짓 한가로이 숲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상트 페테르스부르그를 중심으로 흘러 넘쳤던 새로운 물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혁명가들, 권총 자살한 시인을 지나, 그 시대를 다룬 영화와 발레와 공연, 그리고 이십 몇 년 전에 출장 갔던 모스크바에서 내 추억의 역주행은 끝이 났다.
<미션>은 구한말 조선을 바로 이런 느낌으로 복원해냈다.
물론 격동기의 전모를 혹은 그 공기를 기가 막히게 전하는 불세출의 작품들이 있다. 소설 <장길산> <토지> <태백산맥> <무진기행> <광장>, 영화 <오발탄> <하녀>, 이중섭의 그림들, 윤이상의 음악 같은.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이 건드리는 문제 의식의 폭과 깊이, 여기에 참여하는 창작자들의 종류와 전반적인 완성도를 감안하면, 한국 대중문화 역량의 정점을 보여주는 전례 없는 성취라 할 만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은 여기에 호응하며 댓글과 일상의 삶으로 <미션>을 불러들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흔히 보는 드라마 덕후라기보다는, 촛불 혁명을 거친 새로운 시대의 시민 의식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미션>을 계속 파고들어 이리저리 관심사들을 연결해 나갈 거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역사 전공하는 학생이 아닌 치유가의 눈으로 이 일을 취미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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