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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로의 치유와 성장

요리사의 추억

HaloKim 2018. 12. 13. 05:22
오래 된 영화 중에 <바베트의 만찬>이 잊혀지지 않는다.
 
1987년에 개봉했으니 그 때의 한국에서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6월 항쟁과 직선제 쟁취가 기억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류의 행적들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0년대 초에 감옥까지 갔다 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나는 그 해의 일 중에 한 엉뚱한 여자 요리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일까? 대단한 화제작도 아니고 조용히 막 내렸을 덴마크 영화를.
 
주인공 바베트는 파리의 요리사였으나 프랑스 혁명을 피해 덴마크로 흘러 들어온 뒤 어느 가정의 하녀로 들어간다. 어느 날 자기 손에 떨어진 거액의 행운을 다 털어서 집주인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 끼의 만찬을 대접한다.
 

 

그 영화를 볼 때의 내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아니, 저 여자가 미쳤나” 하는 심정?
 
그와 동시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무심한 표정으로 미친 짓을 저지르는 바베트가 렘브란트나 베르메르 그림들의 깊은 색감 속에 있을 듯한 여자처럼 은밀한 매혹을 풍겼달까?
 
 
오늘 밥을 먹다가 문득 바베트를 떠올렸다. 수많은 논쟁과 차이로 들끓는 마을 사람들을 요리로 녹여 공감과 연대 속에 집어넣고는 슬며시 미소 지었을 그녀를.
 

 

 

 

치유 과정에서 나 자신의 전생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전생이라는 표현이 유감스럽다면, 영혼의 기억이나 집단 의식의 한 조각, 혹은 나 스스로 지어낸 환상이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전생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을 끝낼 수 없고, 자기가 믿기로 선택하는 영역인 데다, 만약 순수한 환상이라고 해도 왜 지금 그런 환상이 떠올랐는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나 화가, 음악가가 창작해내는 것들이 상상의 세계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기 내면을 반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여튼, 내 전생 중의 하나가 요리하는 하녀였다. 주인은 전형적인 유럽식 저택에 사는 귀족 군인이었고, “나”로 보이는 여자는 주인 내외가 주관하는 정중하고 격식 있는 만찬 초대를 위해 주방 요리와 식탁 관리를 책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이 없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신분이 낮고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그 복잡한 일들을 능숙하고 조용하게 해치웠다. 일이 끝나자 2층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작은 침대에 걸터 앉아 작은 창 밖으로 하늘을 내다보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귀족들의 세계에 능통했다. 하지만 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출신 면에서 자신이 속한 하녀와 농부와 사냥꾼의 세계에서 소통하고 살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하고 생각이 많았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누구와도 참된 자신을 소통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 외로움 때문에 일찍 죽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나는 전생을 통해서 경계인의 외로움을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요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시대의 재능 있는 여성들이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재능 있는 여성들의 치유를 하다 보면 유능한 요리사였던 전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내 성향 속에도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다. 어디에 적극적으로 속하려 들지 않는다든가, 취향에 민감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든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요리를 할 수 있지만 정작 차려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든가.
 
이런 성향이 편리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요리나 먹는 것과 관련된 욕망이 복잡하지 않다. 사소한 일 같지만, 적어도 어느 한 분야에서나마 박탈감이나 까탈스러움, 자격지심, 집착 같은 것이 없음을 다행스럽다고 여긴다.
 
전생(이라고 믿는 성향)을 상기하는 것 자체가 어떤 자유로움과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측면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지금 나에게 없지만 필요한 재능이나 자질을 내 안의 잠재력 속에서 끌어 내는 재미가 있다.
 
사랑에 목매다가 속절없이 죽었던 생애를 떠올린다.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우스꽝스러운가.
 
왕이었던 때를 상상하고 그 시절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어떤 일을 대규모로 조직하는 일에 자신감이 생긴다.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할 때, 내가 용감한 군인이었던 적을 떠올린다.
 
겸손이 필요할 때, “그 군인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다른 문화를 때려 부시는 일에 앞장섰지, 그러니 타인의 믿음 체계를 존중하라는 교훈을 지금은 배우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진지하면서도 쉽게 넘어간다.
 
우리의 두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않는다. 미국의 프로 스포츠 선수들, 한국의 양궁 국가 대표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인트 컨트롤 기법을 실전에 효과적으로 결합시킨다.
 
이런 장치를 힐링에 사용하면 어떤가?
 
이번 생에 나에게 없는 자질을 불러일으키고 싶거나, 이번 생에 어쩌다 보니 불운해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있을 때, 탄식하고 겁먹기 보다는 스스로 길러주면 된다. 뭐래도 하면 된다. 안 하면 안 되고.
 
당신과 내가 느닷없이 미국의 프로 스포츠 선수나 양궁 국가 대표가 될 일은 없겠지만, 일상에 필요한 소소한 자질 쯤은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 나이 탓도, 형편 탓도, 팔자 탓도 그다지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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