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에 나는 신이 아니꼬왔다.
미켈란젤로 그림에 나오는 "파란 눈의 나이 든 백인 남자”가 공중에 매달린 채 항상 나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고통스런 내 삶에 자기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외아들을 내세워 아득한 윤리들을 설교했다.
그 훈계를 전하는 사람들이 끼워 넣는 돈 이야기, 벌 주는 이야기가 내 목을 졸라 가슴이 막혀왔다.
내가 뭘 그리 잘못 했는가?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란다. 이 무슨.
당신이 아니래도 난 이미 죽을 것 같거든요?!%^&!@*
2.
누군가 말했다. 그건 종교라고, 신이 아니라.
신은 네 안에 있다고 했다.
대박 사건!
난 황량한 내 가슴 안에서 신의 흔적을 열심히 찾았다. 울면서.
좀 살만 하다 싶은데, 어라?
그걸 알려준 사람이 신의 지위로 서서히 올라서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어디라도 진짜가 있다면 달려가고 싶었다.
신은 없다고, 내가 길을 알려주마고 말하는 사람들이 빈 자리를 슬그머니 꿰어 차기 일쑤였다.
때로는 오만하게, 때로는 겸손한 척.
3.
어차피 내 인생은 글렀어. 힘들고 혼자야.
죽기도 뭣 하니, 그냥 혼자 길을 찾아보자.
누군가 가르쳐주는 대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찾고 해석하고 적용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예수님, 부처님이 폭과 깊이의 여지, 지속적인 영향력 면에서 가장 울림이 컸다.
나는 비로소 그 분들과 화해했다.
나 혼자 오해하고 지랄을 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내 잘못은 아니예요.
당신들을 그런 식으로 믿게 된 것이 내 탓만은 아니잖아요?
난 여전히 신을 모른다.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을 믿지도 않는다.
실은 뭐라고 불러야 할 지도 애매하다.
남이 시키는 것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 병이..(쿨럭~)
근원이라는 말이 대체로 마음에 들고, 창조주라는 말도 가끔 마음에 들고,
노자가 도 - 삶의 길이라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든다.
각설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애달픔과 기쁨, 창조의 권리와 능력, 숭고함을 다 합하면 그것이 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애달픔을 여의고 기쁨과 창조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내가 그렇게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신에게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신이든 누구든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딱 질색이예요.)
이런 선택을 통해 나는 신에게 기여한다고 믿는다.
부분으로서의 내가 전체인 “신”의 속성이 잔소리 하고 화내고 벌주는 것보다는 기쁨과 창조의 속성이 되시도록, 실은 그러한 존재임을 드러내도록 내가 기여하는 것이다.
그 기여가 고작 한 숟가락 분량쯤 되겠지만, 어쨌든 나는 신에게 당당하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할 자격이 있다.
우리는 서로 잘 되자는 파트너인 거다.
추신.
고마워요. 옆에서 항상 도와줬고
지금도 엄청난 신의 가족들을 통해 돕고 계시는 거 알아요.
딱 내가 원하는 대로만, 딱 내 스타일로 도와주셔서 그게 특히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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