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경우도 많다.
이상적이라고 믿는 가족의 형태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주는 위치를 경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타인을 컨트롤 하는 권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등등.
사는 이유는 곧 살아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어려움이 닥치면 정면 돌파를 하든 우회를 하든 반드시 뚫고 나가려 한다. 대체로 그렇게 한 생을 산다.
도중에 지쳐 쓰러져서 "더이상 못해 먹겠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더라도, 치유를 통해 힘이 회복되면 다시 맹렬하게 예전의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당신의 방식 자체를 재고해보라고 말하면 싫어한다. 처음에는 경청하다가, 사는 이유 자체를 건드린다고 생각되는 순간 화를 내고 비난하며 떠날 것이다.
드물지만, 사는 이유 자체를 재검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새로운 측면에 눈뜬다.
처음에는 두 유형의 차이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변화의 폭과 깊이가 확연히 달라진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거나, 더 낫고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나는 살아갈 이유를 찾아 헤매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으로서, 뭔가 차원을 달리하는 변화를 선택하려는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더 끌린다. 그 열정이 지금의 내 눈에는 유일하게 의미있어 보이고, 그들의 열정에 기꺼이 반응한다.
반대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관계에는 무관심하다. 지나칠 정도로.
이것이 요즘 내가 사는 이유이고, 방식이다. 어떤 순간 누군가의 눈에는 좋아보이고, 다른 순간 또 다른 이의 눈에는 어처구니 없어 보일 일이다.
그렇게 사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자유로움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제 멋에 겨워 제 스타일로 사는 이유를 선택할 자유를 준 것이 창조주가 선물한 자유 의지일지도.
'나, 그대,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가 했던 그 말 (0) | 2019.01.28 |
---|---|
헤일로 (1) | 2019.01.26 |
게임 서사의 가능성이 폭발적으로 열리다 -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0) | 2019.01.21 |
모든 상황은 중립적이다 (0) | 2019.01.15 |
<불후의 명곡>, 정치와 문화의 관계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