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전환기를 통과하는 중이라, 호기심을 갖고 나 자신을 관찰해 본다.
매 단계마다 본질적으로 같은 경험이고,
그 정도와 폭이 심화되어 간다.
1,
감각과 인식이 선명해진다.
단서들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는 게 효율적이다.
이번 생에 살아온 모습과 변해가는 과정을 비교하면서 알아지는 사실:
우리가 쓰는 에너지의 대부분은 낭비되는 거구나.
이해하느라 혼란을 겪고, 이런저런 감정을 오가며 덧붙이고, 똑같은 줄거리의 스토리 텔링을 반복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
인생이 사실상 죽음의 돌림노래일 뿐.
자각과 치유는 쬐끔 하며, 그 시간에조차 애를 써가며 딴 생각을 한다.
새로운 창조를 하는 데 사용하는 에너지는 미미하다.
변화가 느리고 같은 자리를 맴돌거나, 새로운 창조를 하려면 죽을 지경의 큰 힘이 들어간다.
이 짓을 벗어난 게 너무나 후련하다.
오죽하면 영성을 자기 해방self-liberation이라고 부를까.
서울에서 40일 동안 긴밀히 만난 사람들로부터
"문제를 캐치하고 풀어나가는 머리를 따라가려고 했더니 어지럽고 토하려고 한다"
"머리가 너무너무 좋다"는 소감을 들었다.
머리를 혹사하는 건 옛날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무엇이 달라진 건가?
에너지체를 투명하게 사용하는 훈련이 되었다.
우리 안에 내재된 기능들이 공감각적이고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눈과 머리로 들어온 정보가, 가슴으로 전달되어 공감empathy을 불러일으키고, 논리적 판단을 거쳐 언어화 하는 일련의 처리 과정이 빨라지는 것이다.
오히려 머리를 비운 상태에서 예리한 정보가 얻어지며,
치유 에너지도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전달된다.
2.
외부 세계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물론 민감하게 느껴지고 분석하지만, 나에게 상처나 불안을 일으키지 않는다.
예전에는 예민한 만큼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외부가 나에게 호의를 보이도록 더 애를 쓰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감정을 두려워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사람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모든 노력이 쓸모 없었다.
내 삶의 조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은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을 유지하고, 내가 못 가진 것들은 여전히 다른 세상에만 있다.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바란다면 죽었다 태어나는 편이 빠를 것이다.
관점을 바꾸고, 대처하는 방법을 새롭게 익히면 된다.
삶이 아프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또한 생존이 생존 불안과 동의어는 아니다.
지금 나의 경제력은 여전히 별볼일 없다.
내 인생에 가장 돈이 많은 상태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밑바닥 몇 퍼센트에 속한다.
나는 열심히 일할 것이고, 일하는 것이 모두 돈을 낳도록 살 것이다.
이것을 위한 노력이 몽땅 시시하고 무의미해보이는 것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안다.
그 허무한 하찮음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것을 기쁘고 보람있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
미지 혹은 불투명이 불안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삶의 방향과 방법을 정했으니, 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어쩌려고 하는가?
물론 모른다.
그렇게 묻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가?
3.
삶의 근본 정서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슬픔과 우울의 정조였다면,
지금은 대체로 평온하고 대체로 기쁘다.
밖의 이유가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의 반응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주 많다.
부정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선택할 수 있다.
옵션들을 배우고 익혀서 쓰면 된다.
그런 행동이 몸에 익으면 긍정적인 선순환의 힘이 커진다.
예스면 예스라고 말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한다.
심플하게 때로는 정교하게.
바깥이 나에게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반응을 두고 나는 또 다시 선택하면 된다.
이 연속된 반응chain reaction이 마음에 들면 유지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식을 가다듬으면 된다.
모든 순간에 나의선택이 개입됨을 알기때문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나의 책임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이 풍부하면서 간결해진다.
4.
대체로 생각없이 지낸다.
필요할 때 집중해서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머리가 자동으로 굴러가지 않게 멈춘다.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 원래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거라고 느낀다.
몸은 여전히 무언가를 한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몸까지 멈추거나 다리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뭔가 대단해보이는 일이든 시시하고 사소한 일이든 멍청하게 시간낭비 하는 일이든, 거기서 거기라고 느낀다.
시시한 일들을 할 때는 내가 시시함을 인정하고, 보람찬 일을 할 때는 보람 있는 인간으로 사는 거고, 거룩한 일을 할 때는 감격하면 된다.
내가 선택하는 그것이 그 순간의 나임을 인정하면 된다.
대단한 나, 하찮은 나의 분열이 사라진다.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선택하고 실행하는 시간을 늘려나가는 것이 성장이다.
그 선택의 총합이 이번 생의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잠정 결론:
이 방향으로 계속 살아보려 한다.
인생이 재미난 실험이 될 것이다.
아마도 30년쯤 더 이어질 이 실험의 목표는 "진실로 믿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이 될 것이다.
물론 그는 어떤 비유를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거짓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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