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합적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가정" 출신이다.
이 건조한 개념어에 담긴 의미가 내 삶이다.
이런 가정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과도한 책임을 지려하는 자식이 하나쯤 나오기도 한다.
그의 삶은 필연적으로 참혹하다.
불가능한 미션에 생명을 불사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삶에는 독특한 가련함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본 적도 없으면서 본인이 그렇게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고도로 성숙한 숙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복합적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가정" 출신의 "책임감 증후군"은 치유 대상일 뿐이다.
성공하고 돈을 버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둠의 구멍이 블랙홀로 커질 뿐이다.
치유한 다음에 혹은 치유 하면서 돈 벌고 성공해야 한다.
나는 힐러로 일하면서 나의 클라이언트와 학생들이 부러울 때가 간혹 있다.
'원할 때마다 몸을 보살펴주고, 내 이야기 들어주고, 묻는 것마다 미주알 고주알 친절하게 알려주는 힐러가 내 옆에도 있었으면...'
그들 역시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치유 초기에는 나를 직관적으로 좋아하는 수준의 신뢰로서, 이런 호감이 치유를 지속하는 원동력이다.
중기에는 내가 자신을 이해하는 특별한 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 역시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싶어 한다.
치유가 진행되어 갈수록 나와의 관계도 요동 친다. 힘들어 죽는다고 징징거리고 삐지고 의심하고 물어뜯고 매달리고 고집피우다 반성하고 등등, 자신이 살아온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온갖 에고의 난장판이 오래도록 펼쳐진다.
이 시기에 나는 인간적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받은 돈을 얼굴에 집어던지고 나가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의 일상이 수행으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예수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준으로 삼았다.
좋아, 당신의 지금과 같은 모습을 490번까지 지켜보아 주겠다.
491번째에는 엉덩이를 차서 쫓아버리리라. 그리고 예수께 당당히 말하리라 - 시키는 대로 했으니 내 잘못 아니거든요!^^
그리고 어려운 나의 마음 안에 평화가 올 때까지 끝까지 파고 들어갔다.
"치유가여, 당신 자신을 치유하세요physician, heal thyself"라는 예수의 말이 몇년 동안 나에게 비통하고 절실한 화두였다.
어느 날 나의 마음이 몹시도 단순해졌다.
김치찌개 파는 사람이 돈 받으면 무조건 찌개 한 그릇 끓여내듯이, 나도 돈 받고 힐링을 파는 장사꾼이다.
나의 정체성에 그리 대단한 의미 부여하지 않고, 일상으로 뿌리내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진짜 힐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30년쯤 살면 어센션/해탈이 안 될 수가 없겠네.
이러한 질적 전환을 양자적 도약quantum leap이라 부른다.
치유는 치유가를 먼저 성장시킨다.
치유 후반기에는 클라이언트가 안정적이고 성숙한 신뢰가 무엇인지를 경험으로 알게 된다.
자신을 손가락질 하거나 버리지 않고, 칭찬도 하고 야단도 치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와의 관계가 담백해진다. 필요한 말, 진실로 하고 싶은 말만 해도 불안하거나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존재 자체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오고, 그 바탕 위에서 재양육을 위한 훈육discipline이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훈육을 자기에게 욕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럴 싸한 말 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일이 줄어들고, 비로소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는" 단계가 된다.
삶이 안전해지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른 클라이언트는 그 자신이 이미 힐러가 되어 있다.
나는 엉덩이를 쥐어 차면서 빨리 힐러로 개업하라고 구박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 그 힐러 중에 한 명이 세션을 청해왔다.
힐링과 교육에 필요한 과정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불과 몇 십초도 안되서 떠오른 제안이 그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자신감을 준다"고 했다.
내가 떠올린 그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주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예수님이기도 하고 성모님이기도 하고 절에 가면 부처님과 관음보살님께 절하면서 "주여"라고 부른다.
주님의 응답이었을까, 내 생각 속의 데이터를 끄집어 올린 것일까?
내 경험으로는 두 가지가 구별되지 않는다.
기도나 채널링은 당사자의 이해와 정보 수준을 넘어서는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주어진다 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기도/묵상/명상이라는 이름으로 내 의식 속의 데이터를 검색하는 거라고.
"주여"라는 키워드를 쳐서 엔진 검색을 하면 즉각 찾아진다.
그것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유익하다.
멋지군.
나에게도 언제나 묻고 의지할 수 있는 선하고 든든한 빽이 생긴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