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가, 영성가들은 흔히 자기 의심과 외부의 시선이라는 두 개의 덫에 시달린다.
무엇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른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잘못된 것 같다"는 거대한 자존감 트라우마가 바탕에 깔려 있고, 이것을 걷어내는 과정, 자기 확신의 과정이 곧 치유적 영성의 여정이기도 하다.
또한 외부의 시선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 시선들은 강력한 권위의 성채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대체로 종교, 지적 합리주의, 유물론적 과학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성채 내부의 분열과 자기 모순에 대해 잘 알면서도, 성곽 바깥에 대해서는 표변한 얼굴로 말한다.
"사이비!"
내 눈에, 내 실험 도구에 보이는 것만 진실fact일 뿐, 보이지 않는 것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부 과학자들을 나는 유물론자라고 부른다.
심지어 인간의 감정과 의식도 뇌세포가 만들어내는 환영illusion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환영이 보고 생각한 발견을 무엇 때문에 사실 혹은 진리라고 말할까?
과학이 신을 대신하는 새로운 절대 권위인가?
무신론적 지식인의 관용은 자기의 믿음 체계를 벗어나지 않을 때로 한정된다.
그 틀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어리석어지고 가짜 혹은 사이비로 경멸 당한다.
종교는 말해 무엇하랴.
천사/보살 같은 얼굴과 옥타브를 높인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일시에 돌변하는 순간들을 아주 많이 보고 들었다.
나는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국어 사전에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라고 규정한다.
이 규정이 사회적으로도 통용된다.
한자의 본래 의미는 "비슷하지만 아니다"라는 뜻에 불과하다.
여기에 어떤 해석, 즉 본질과 가짜라는 가치 평가를 집어넣은 것이다.
나의 삶은 "사이비"로 점철되어 있다.
뭔가 비슷한데 아니다.
존재 자체로 속하지 않거나, 스스로 벗어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죽음과도 같은, 불타는 고통을 거쳐 내 자리를 찾았다.
내 마음과 삶의 자리.
이 가치의 소중함은 지나온 시간의 애달픔과 비례한다.
또한 살아보니 알겠다.
소중한 자기 자리는 온전히 나 스스로 찾아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누구의 것을 똑같이 카피할 수도 없고, 따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님을.
그래서 내 자리는 지구의 70억 인류 가운데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다른 누구의 자리도 내 자리와 똑같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따라 하면 몹시 싫다.
나를 좋아한다고,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말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공유하겠지만, 그 제안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더 치열하게 길을 안내하겠지만,
그것이 최고의 답이라고 받아들여질 가능성에는 몸서리가 쳐진다.
우리는 모두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영원히 배운다.
그래서 독특하고 유일한 자신이 되어가는becoming 것이다.
나의 근본 가치는 종교로부터 배웠지만, 진리를 확정적으로 설파하는 목소리는 싫다.
나는 유신론자이나 종교인은 아니다.
나는 합리주의와 지성과 예술을 사랑하지만, 그 너머를 더욱 강렬하게 흠모한다.
나는 과학으로부터 안전판을 제공받지만, 그 뜀틀이 나를 유물론 철학으로 던져올리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의학에 감사하지만, 몸이 현재의 의료 체계로만 다루어져야 한다는 태도라면 때로 죽음을 부르는 폭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가치를 누군가가 사이비로 부르는가?
그렇다면 나는 사이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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