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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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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 세상

스탕달 신드롬 - 전생이 있다면

HaloKim 2020. 7. 17. 17:13

신윤복의 <미인도>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림이 퉁퉁퉁 움직여 내 앞에 턱 서는 듯한 시각적인 충격을 느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광화문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을 시절이니 적어도 1995년 이전의 일이다.

 

몇달 후 간송미술관에 갔다가 다시 <미인도>를 보았고, 나는 영인본을 사서 사무실 벽에 걸어두었더랬다.

 

 

그림은 어떤 영감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켰다.

그 아이디어와 18세기 조선에 대한 평소의 관심을 결합하다 보니 <미인도>라는 시나리오가 되었다.

 

그 때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감독들은 물론이고 영화계 지인들이 "꼭 나랑 함께 영화로 만들자"고 신신당부 했고 실제 투자자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개인 사정으로 주춤거리다 영화계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치유한다고 꼼지락거리는 사이에 한국의 여러 대중문화 분야에서 같은 이름 혹은 유사 소재의 작품들이 속속 발표되었다.

 

내 아이디어의 핵심 이야기를 살리고 그 매혹을 살릴 수 있도록 직접 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한동안 아쉬움이 있었지만, 정조라는 인물과 그 시대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게 되는 흐름을 보면서 혼자 흐뭇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도 유사한 충격을 안겼다.

죽음과도 같은 우울을 헤치고 겨우겨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음악들은 내 영혼의 양식과도 같았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풍성한 문화적 향연과 썩어가는 짜르 체제, 혁명의 기운이 싹트는 낯설고 설레고 불길한 시대 한 복판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영화 기자로 모스크바 출장을 갔을 때는 거리에 영어 간판 하나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기내에서 슬쩍 본 러시아어 알파벳을 영어와 대조시켜 외운 뒤, 혼자 길을 찾으며 관광을 다녔다.

 

위험하다고 나다니지 말라고 영화사 관계자가 신신당부 했고 실제로 동행한 다른 언론사의 남자 기자는 호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함께 간 여성 사진기자 후배와 함께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간판과 안내문을 더듬더듬 읽었다.

 

후배가 물었다.

"선배 러시아어 공부한 적 있어요?"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두 개의 시기와 공간에  살았을 것만 같다.

 

손열음의 라흐마니노프는 그 시절 내가 듣던 버전에 비하면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그녀의 손가락만큼이나 가볍고 쳥량하다.

2020년의 젊은 여성 천재 피아니스트에게서, 땅에 꺼져 묻혀버릴 것만 같던 그 시절의 나를 살린 육중하고 비감하며 웅장한 연주가 나올 수는 없겠지.

 

ps.

아이 깜짝이야~

유투브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이 글을 썼는데, 끝나고 나니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이 자동 재생된다.

깜찍한 유투브 ㅋㅋ

 

youtu.be/9FoNa4l7T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