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혁명은 한반도에서 근대의 정신modern consciousness이 드러난 역사적 시작점일 것이다.
일견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은 100년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어쩌면 빠르게 실현되고 있다.
1894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한 세기를 훗날 역사가들은 한국이 근현대로의 전환을 압축적으로 이뤄낸 혁명의 시기라고 부를 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동학혁명의 횃불은 역사적으로 멋지게 성공하는 중이다.
내가 인식하는 동시대는 이 혁명의 마지막 소단계이다.
남아있는 전근대적 잔재, 봉건적-군국주의적-식민주의적 잔재를 정화하는 과정이고, 이를 전 국민이 치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이 시기동안 민중-국민-시민들이 엄청난 피를 흘렸다.
희생의 유혈이 낭자하지 않은 시기가 없었다.
동학혁명군을 필두로, 독립군, 최소 수백 만명의 무고한 백성들이 비참한 노역을 당하거나 살육되었다.
해방 이후 권력자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 전쟁부터 1980년 백주대낮 대도시의 인간 사냥에 이르기까지 집단과 개인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촛불혁명부터 비로소 시민들의 피흘림이 멈추었다.
아뿔사!
이제 그 제단에 정치인들의 목숨이 바쳐지고 있다.
시민들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를 권좌에서 몰아내거나 사법적으로 추적하고 명예를 분쇄하자,
그들도 반격을 하고 있다.
목숨을 건 혈투.
노무현, 노회찬, 조국, 박원순..
이들의 죽음 또는 희생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장준하, 여운형, 김구의 죽음이나 희생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의 윤리성에 덫을 놓았고, 그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복잡다단함이라는 모순을 들어 공격하고 그 화살을 받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극성.
살아서 버티는 이재명이 새삼 다시 보이는 이유다.
이들의 죽음과 희생은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이다.
시대의 제단에 바쳐지는 피.
나는 이 시대의 너머를 애써 바라본다.
역사적, 시적, 영적 상상력을 가지고.
그 길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길이 있는가 없는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는 상관없다.
그저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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