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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사례

싸이코지만 괜찮아 - 2. 가족의 폭력과 살의

HaloKim 2020. 9. 1. 20:06

가정 안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학대의 이야기는 여주인공 고문영의 가족으로부터 나온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목졸라 죽이려고 한다.

뭐라뭐라 이유는 씨부리지만 어쨌든 살인 미수다.

 

아동 학대와 아동 성폭력의 80%는 가족 안에서 일어난다.

동화에 나오는 나쁜 계모가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친부, 친모에 의해 저질러진다. 

 

나를 때리고, 방치하고, 잔인한 말로 학대하고, 감정적으로 철벽을 치고, 강간하고, 죽이려는 자가 내 부모라는 사실만큼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 중에 한두 가지라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안정적인 삶이 불가능해진다.

인간 관계를 맺기 어렵고 가족 안에서도 손가락질 받는 "괴물"이 된다.

 

또한 그것을 목격한 형제자매에게도 마찬가지로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나와 내 여동생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기이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엄마가 동생에게 왜 저러지?

 

일곱 살 무렵 꿈을 꾸었다.

색깔이 많은 크레파스가 아주 멋져보이던 시절이었다.

 

꿈 속에서 엄마와 내가 육교 위에 서 있었다.

엄마는 들고 있던 크레파스 하나를 육교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나는 엄마의 표정과 떨어지는 크레파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땅에서 똑 부러진 크레파스가 여동생으로 변하더니 다리를 절뚝였다.

 

나의 고소공포증은 그 꿈 때문일까?

 

그 후 실제로 어떤 상황 속에서 엄마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나는 얼어붙었다.

 

동생들을 돌보고 지키는 것을 내 역할로 삼았고, 엄마아빠가 화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나는 매일매일 실패자가 되었다.

 

여동생이 어느 날 울면서 말했다.

"엄마, 내 심장은 강철이 아니야."

 

내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동생들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예감이 든 날이다.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까지 간신히 해낸 여동생은 나에 이어 우리 부모의 두번째 존재 증명이었다.

그 후로 비참하게 무너져내리더니 아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엄마를 향한 분노가 폭발하면 집안은 지옥이 되었다.

 

나는 동생을 달래고 용돈을 주면서 붙잡아 두고 "정상적인" 생활을 시키려 애썼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다.

하루빨리 집을 떠나게 도왔어야 했다.

 

동생은 제 발로 나갔다.

내가 들은 마지막 인사가 "언니에게는 유감이 없어"였다.

 

이 여동생은 군대에서 세상을 떠난 남동생과 함께 내 인생의 아킬레스 건이 되었다.

 

치유 과정에서 처음에는 이런 이슈를 끄집어 올리지도 못했다.

감정은 철저히 파묻혀 있었다.

 

돌파구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아버지는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소리지르고 울면서 집 밖으로 밀어내려 애썼다.

 

어떤 날은 꿈에서 엄마를 때리고 욕하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하며 대문 밖에 서 있는 꿈, 어딘가에 주차한 차를 못 찾고 집 근처에서 헤매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다.

 

"엄마를 용서할 수 있나요?"라고 대뜸 물어준 낯선 채널러가 고마웠다.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끼리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여정을 걷도록 허락해주어야 해요. 당신은 그저 축복하고 내려놓으세요. 당신 스스로 준비가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할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생에 처음 경험하는 깊은 위안을 주었다.

 

나는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애썼다.

죄책감이 줄어들면서 몸의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

 

여동생은 3년 전 아버지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본인이 할 수 있는 예의를 표한 건지도 모른다.

 

장례식에 온 모든 이들이 "현모양처의 화신"인 엄마를 칭송하며 나에게 훈수를 두었다.

초면인데 적의를 가지고 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엄마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나를 마주보았고 웃는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 손님에게 와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녀는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동안 몸이 안 좋아서 죽을 뻔 했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아주 높고 예쁜 목소리를 만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 왜 아팠을까나?"

이 말은 나에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아프다는 건 평생 나를 따라다닌 질곡이었다.

엄마는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일까?

 

장례식을 마치고 엄마와 다른 동생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기대와 분노가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모른 척 하며 밥을 사고 똑같은 금액의 봉투를 하나씩 건넸다.

 

엄마와 작별할 때 포옹한 뒤 손을 잡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예전의 큰 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 딸이 되돌아오기를 바란다면 더이상 거짓말 하면 안돼요.

 

그렇지만 엄마가 선택하세요.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변화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알아요.

바꾸고 싶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그동안 애쓰셨어요.

내가 엄마를 만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예요."

 

그 후로도 엄마는 종종 전화와 문자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 우리딸, 엄마는 네가 언제나 그래왔듯이 성공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감사합니다. 엄마도 잘 지내세요"라고 답장한다.

 

2년 전쯤이었을까.

내가 특정 클라이언트에게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책임감 증후군을 돌이켜 보면서 깊은 자책이 몰려왔다.

 

겉으로는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제자리에 맴돌게 하는 결과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돈 받고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싶어 새벽마다 108배를 했다.

 

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내 안으로 한걸음씩 더 들어갔고 마침내 나의 내면 아이, 동생들을 지키지 못한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났다.

절 하다 말고 어린애처럼 발을 버둥거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1년 전 꿈 속에서 드디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열고 싶지 않았던 마지막 방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네 명의 동생들이 5~6세의 어린아이 모습으로 나란히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무기력하게 누워있고 그 집 안에 어머니는 없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게 울었다.

 

며칠 후 꿈에 연락 끊긴 여동생이 나타났다.

무언가 희망적인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은데 뚜렷하진 않았다.

 

다시한번 기도했다.

내가 힐러로 살면서 혹시라도 남는 선업이 있거든 그 동생에게 향해주시기를.

 

그리고 평생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이 이야기를 꺼내놓기로 마음 먹었다.

힐러로 일하는 동안 이런 이야기가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어느 날 잠을 자다가 퍼뜩 깨면서 전화기에 손이 갔다.

카톡이 와 있었는데, 어린 시절 매 맞던 장면을 떠올리며 숨을 쉬지 못하고 횡설수설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아이고 우리 아가 **야 ㅠㅠㅠ"라고 답을 보냈다.

차분한 톡이 몇 번 오갔고, 그 클라이언트는 죽음과 위선, 폭력이 뒤얽힌 어린 시절을 무사히 대면하고 넘어갔다.

지금 그녀는 힐러로 일하고 있다.

 

나에게는 카톡을 수시로 확인하고 즉각 답하는 버릇이 생겼다.

 

힐러로서 매일 마주치는 잔혹한 상처와  깊은 고통의 스토리가 대부분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부모 손에 죽는 아이들의 뉴스가 끊이지 않고, 극단적인 육체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이 몇 만 명이라고 영화 <미스 백>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자식과 동반 자살하는 부모들도 있다.

어째서 부모가 살인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부모의 성폭력은 또 어떤가.

미국의 연구자들은 성폭력 후유증을 총 맞은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런데 내 부모가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속적인 강간과 낙태, 출산까지 하게 만들고, 경찰에 걸리면 용서하는 탄원서를 쓰게 하고, 법원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형량을 낮게 선고한다.

저 비유대로 하자면 가정 안에서 일방적인 총격전이 매일 벌어지는 것 아닌가?

 

하긴 부모를 처벌한들 그 아이들을 보살필 안전망과 양육 시스템이 있어야 말이지.

 

이런 공포 속에서 아이들의 눈에 부모가 "서쪽 마녀"로 보이는 것이다.

 

동생과 나의 이야기가 서쪽 마녀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동화로 쓰여지기를 바란다.

 

다만 내 부모형제의 삶에는 존중받아 마땅한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나의 이야기는 나의 관점일 뿐이다.

 

그래서 과거의 내 이름을 익명으로 남겨두고 싶다. 

가능하다면 얼굴까지도.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