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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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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사례

싸이코지만 괜찮아 - 3. 모범생의 이름으로

HaloKim 2020. 9. 3. 21:45

드라마 속 고문영의 엄마는 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넌 남들과 달라. 내가 만든 최고의 창작품이야."

 

그 이야기는 이렇게 변주된다.

"이제 보니 너는 나의 완벽한 아기가 아니라 실패작이네. 할 줄 아는 게 없고 쓸모가 없어."

 

내 머리 속에는 이와 비슷한 돌림노래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스무 살 이전 나의 정체성은 "모범생"이었다.

심지어 중학교 때 윤리 선생님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불렀다.

세계사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 ** 일어나 봐. 산업 혁명의 원인이 뭐지?" 같은 류의 질문을 던지거나, 교문 앞에서 마주칠 때 미소 띤 얼굴로 " ** 이리 와 봐"라고 부르셨다.

 

가사 과목은 시험과 노트필기를 함께 평가해서 점수를 매겼는데 학기말에 누군가 내 노트를 훔쳐갔다.

나는 친구 노트를 빌려 전권 필사한 뒤  제 시간에 제출했다.

그리고 겁에 질려 메모를 덧붙였다. "중간고사 확인 날인이 없는 건 노트를 잃어버려서 베끼느라 그렇게 되었어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화를 내기는 커녕 기가 질린 표정을 지으셔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이 되자 이상한 조짐이 더 많이 나타났고 눈치챈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 스스로 자각한 시점은 대학입학 원서를 쓸 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전공을 택하고 싶은지 모르겠고 무언가에 대한 욕구도 없었다.

이런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답을 내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교과목명을 죽 나열한 다음 하나씩 지워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역사였는데 내 인생에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던 중학교 세계사 선생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역사로 결정났다.

 

이런 패턴,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누군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상징하는 것, 혹은 중요해보이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모범적으로, 어떤 죄책감에 쫒기며 미친 듯이 하는 삶이 지속되었다.

나머지는 아는 게 없었다.

 

똑똑한 모범생으로 성취를 반복하는 나, 끊임없이 어딘가 부조화스러운 나 사이의 자아 분열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이유를 찾고 답을 찾으려 언제나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에 대한 평판에 단서들이 들어 있는데, 그 시절에는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

이를테면 이십 대에는 "순수하다, 진공관에서 꺼낸 애 같다"와 "사람의 감정을 헷갈리게 한다"는 류가 공존했고, 30대가 되자 "세상 물정을 모른다. 매니저로 관리해주고 싶다"와 "머리를 너무 많이 쓴다"가 충돌했으며, 점점 나를 필요로 하면서도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40대 초반이 되자 표면적으로는 거칠 것 없이 날아오르는 시기였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의문과 어둠의 고통이 극심했다.

건강도 점점 더 자주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뉴욕 출장길에 전환기를 맞았다.

호텔 방에서 잠들기 전 기도를 했다.

"제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세요."

 

몇 시쯤 되었을까.

크게 소리를 지르는 내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해!"

 

어둠 속에 앉아서 곰곰 생각해보니 기쁨과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 되지.

 

잠시 후 다시 절망에 빠졌다.

내가 뭘 원하는데? 

그 답을 여전히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2년 여의 시행착오 끝에 인생의 모든 것을 엉뚱한 곳에 탈탈 털어 바치고 미국으로 굴러 떨어졌다.

엔진이 고장난 채 비행하던 헬리콥터가 사막 한 가운데 불시착한 형국이었다.

 

건강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가 막장이었다.

원망이나 회한은 커녕 모든 것이 어찌나 담담한지 오, 이제 죽어도 되겠는걸, 생각했다. 

실제로 가만히 누운 채  죽는 방법을 몇 달간 궁리했다.

 

어느 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민폐 끼치지 않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는 자존심이 남아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죽음조차도 욕망이었다.

 

일어나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한 번 알아나 보자.

살면서 어떤 노력을 안해봤길래 인생이 이 지경인지 그것도 궁금했다.

 

일단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의 건강이 필요했다.

병원에서 놀라운 금액의 진료비를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큰 병원 가보라"는 말과 함께 약 봉지 하나 받아든 채 길거리에 서서 생각했다.

평생동안 했던 병원 순례를 또?

 

건강 회복부터 나 스스로 해볼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안될 것 뭐 있나?

 

그때부터 컴퓨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셀프 힐링"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했고, 몇 달간 이런저런 조사를 거쳐 레이키와 온라인 최면 학교를 선택했다.

지금까지 시도해본 적 없는 방법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고 비용 부담이 적었다.

 

이 선택이 앨리스의 토끼굴이 되었다.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토끼굴을 통해 치유와 영성이라는 신대륙에 도착했음을 알고 있다.

 

치유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한 길고 긴 의문들이 비로소 풀려나갔다.

돌파구 중의 하나는 내 자존심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 엄마가 말했다.

"네가 아빠보다 더 믿을 만 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에게 동생들을 맡긴 뒤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어른보다 믿을 만한 어린이라는 자존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2백원짜리 수박을 사서 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돈을 써도 되는지, 수박을 통째로 다 먹이면 엄마가 화를 낼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학교에 다녀와서 동생들 먹이려고 밥통을 열어보니 어제 해둔 밥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시절 전자제품 수준이 그랬다.

나 자신이 믿음직스럽기는 커녕 동생들에게 제대로 된 밥도 먹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황당한 느낌이 밀려왔다.

 

아홉살 때는 한살짜리 남동생을 등에 업고 어두운 밤길에서 어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며칠이었는지 몇 달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를 찾으러 무작정 버스를 탔다가 도시 한 복판에서 길을 잃을 뻔 했다.

어른들이 없는 그 집에 그 날 밤 역시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멀리서 휘몰아쳐오는 밤바람에 등에 업힌 동생이 숨을 헐떡였다.

내 등이 동생의 숨도 지키지 못할 만큼 작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치유 과정에서 이 단편적인 기억에 담긴 의미들을 비로소 깊이 되돌아보았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에 대해 통렬히 깨우쳤다.

이 과정을 헤치고 나가는 데 데이비드 호킨스의 에고 분석에 큰 도움을 받았다.

 

최면 학교의 교과 과정도 충격의 연속이었는데,  내면 아이라는 주제를 배울 때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옴짝달싹도 못했다.

내면 아이의 개념과 치유법을 다룬 책들을 찾아 독학하며 본격적으로 나의 심연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내면 아이 치유는 결국 나의 성장기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감정적인 연결을 얻지 못한 채로 모범생 엘리트로 키워진 사람들에게 이런 증후군이 있다는 것을 힐러로 일하는 동안 더 깊이 깨닫고 있다.

이런 류의 아동 학대는 "평범한" 중산층 엘리트 혹은 상류층 가정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고,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학대임을 부모나 당사자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내가 만난 한 클라이언트는 "아무런 문제 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예쁘고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대학 진학과 직장 생활, 결혼, 대학원 공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순탄한 삶이었다.

 

그녀를 만나게 된 계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위경련 때문이었다.

몇 주에 한번씩 통증이 엄습하면 6시간씩 시달리곤 했다.

그녀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무표정하고 예뻤다.

 

힐링 스쿨 수업 중에 어린애처럼 펑펑 우는 모습을 두 번 보았다.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 대표로 대회 출전을 준비하는데 제대로 못했다고 선생님께 야단을 맞은 날, 예쁜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겁에 질려 혼자 울었고 엄마에게는 그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결혼 후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에 차질이 생겼을 때 엄마의 첫 반응이 “병신 같은 게 조심하지 않고”였다. 

두 아이 모두 그랬다.

산후 우울증과  자기 의심,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감이 극심한 위경련으로 나타났다.

 

치유 과정에서 어린 시절을 대면하고 재해석 하는 것과 비례하여 위경련도 완화되었고 얼마쯤 지나자 배 아프다는 소리 자체가 없어졌다.

그 과정에서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진실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은 처음 봐요."

 

그녀는 지금 <에세네 4바디 힐링 스쿨>의 힐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