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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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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사례

싸이코지만 괜찮아 - 5. 스토리텔링 바꿔주기

HaloKim 2020. 9. 4. 18:16

문상태는 자폐인 동시에 어머니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트라우마가 중첩되어 있다.

살인자의 나비 장식 때문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봄에는 더욱 더 견디지 못한다.

 

그의 치유와 성장은 나비 공포를 대면confrontation하는 과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세심하게 준비되어야 할 전제들이 있다.

 

우선 강태가 보호자 역할에서 어느 정도 손을 떼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가 불안해하지만 갈등과 조정기가 지나면서 상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훈련이다.

친구는 상태에게 피자 가게 알바를 시키고, 병원 원장과 고문영은 그림을 그리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쓸 것인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보호를 받기만 하던 약자로서의 정체성에 변화가 시작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을 돌보는 연습이 시작된다.

상태는 아픈 문영이에게 죽을 떠먹이면서 "내가 오빠니까, 동생을 지켜줘"라고 되뇌인다.

그 결과 강태가 위험에 처했을 때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는데, 이 경험이 상태 자신의 내적인 힘을 확인하고 강화시켜주는 전환점이 된다.

 

마지막으로 치유가인 오지왕 원장이 나비의 뜻을 새롭게 규정해줌으로써 트라우마를 전환시킬 근거를 마련해준다.

그리스어로 나비는 프쉬케. 싸이코라는 뜻이자 치유를 뜻한다고.

 

치유 작업에 어떤 개념이나 이론, 상징, 도구들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문제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나에게 치유로서의 "나비"는 비와 밤, 그리고 음악이었다.

 

내 기억 속에 가장 오래된 장면은 두 살 무렵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있을 때였다.

비 내리는 밤이었고 희미한 전구가 나무로 된 마루와 마당을 비췄다.

하얀 속치마 바람으로 쪽마루에 앉아 나를 안고 있던 엄마가 무릎을 까딱까딱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엄마에게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어떤 멜로디를 들으며 마당에 동글동글 생겨나는 물무늬를 바라보았다.

 

그 때의 멜로디를 기억하고 가사를 찾아보니 이랬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한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나는 평생동안 밤과 비, 음악을 사랑했다.

달콤한 외로움과 비애.

 

밤과 비, 음악은 저 감정들과 뗄래야 뗄 수 없이 붙어다니며 나를 슬프게 하거나 촉촉히 위로했다.

이 모든 것이 모성애에 대한 나의 감각적 경험과 기억이라는 것을 치유 과정에서 깨달았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는 스물 세 살.

어린 나이다.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 그 밤에 똑똑하고 야심찬 젊은 여성이 딸을 껴안고 무슨 생각을 하며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인생과 소망과 결핍감을 상상해보았다.

 

내가 엄마의 처지였다면 그녀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나는 기억 속의 젊은 여성에게 위로와 사랑, 치유의 에너지를 보냈다.

몇 십년 후의 그녀가 스스로를 용서하기 바란다고 마음으로 말했다.

그리고 두 살의 어린아이를 내 가슴에 품었다.

 

문상태와 달리 성숙한 성인 자아인 문강태에게는 힘든 과정이 하나 더 필요하다.

가해자의 신원과 가해의 내용을 명시적으로 직면하는 일이다.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내 인생을 이렇게 바닥에서 기도록 만든 그 사람을 찢어죽이고 싶었어요."

이처럼 격렬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은 치유 과정에서 흔한 일이다.

 

억압되었던 분노의 에너지가 있는 그대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상처를 대면할 준비가 되어간다는 뜻이다.

이 작업을 도와주는 사람이 힐러이고, 소수의 신뢰할 만한 치유 동반자가 이야기를 공유하는 대상이 된다.

 

나는 꿈과 내면 일기, 그림 일기의 도움을 받았다.

 

이 때는 분별없는 허용, 조건없는 공감과 지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안전하게 내려놓을 수 있고, 외부 관계가 평화롭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상태-강태 형제는 비로소 엄마의 죽음과 자신들의 슬픔을 애도한다.

입 밖으로 꺼내 편안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자 강태의 스토리도 바뀌기 시작한다.

형과 함께 먹으러 간 짬뽕이 실은 형에게는 너무 매운 음식이었다는 것.

엄마가 여전히 형 옆에 앉아서 먹는 것을 챙겨주었기에 몰랐지만 그 짬뽕 외식은 강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발견한다.

 

트라우마에 갇혀 있으면 시선이 좁아진다.

치유되어야 비로소 넓게 보인다.

 

내 경우에는 남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동생의 영혼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숙한 영혼들은 하나의 테스트를 거쳐.

어떤 조건에서도 성숙한 삶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그 테스트를 통과했어.

누나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쳐줬어. 정말 고마워.

 

나는 이번 생을 예정보다 빨리 마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내가 어떤 방법으로 떠났는지가 누나에게 왜 중요해?

그들의 일은 그들 영혼에게 맡겨 둬.

 

누나는 여기 남아서 할 일이 더 있고 지금까지 아주 잘 해왔어.

우린 많은 생을 함께 해왔고 앞으로의 여정도 함께 할 거야."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면서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의문과 죄책감이 있었다.

 

나는 뭣 때문에 정의 운운 해가지고 동생이 그 부조리한 폭력을 버티게 만들었을까?

동료와 약자를 괴롭히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그 상황을 가벼이 여겼을까?

동생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가족을 폭로하겠다"는 기관원의 협박과 "그만 덮자"는 부모의 요구에 나는 왜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러나 군대와 국가 권력과 가족과 나 자신을 파고 들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이 비로소 사라졌다.

 

나에게 말 걸어온 존재가 정말로 동생의 영혼인지, 내 환상인지, 귀신에 씌인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실체가 무엇이든 내가 오래된 짐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숭고함the sublime을 택하기로 한다.

높은 의식으로의 상승ascension to higher consciousness은 매우 아름답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 것은 없다고, 망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차원과 영혼, 내적 신성과의 연결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당신의 삶, 그런 도움 없이도 일어설 수 있는 당신의 힘과 지성을 존중하고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