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바디® 힐링 하면서 어센션을!

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치유 사례

싸이코지만 괜찮아 - 4. 부모형제의 경계선 침해

HaloKim 2020. 9. 4. 14:07

이 드라마가 이뤄낸 가장 중요한 치유적 성취는 남자주인공 문강태를 치유의 대상으로 파악한 점이다.

 

자칫하면 그는 치유계의 백마 탄 왕자님 또는 남자 신데렐라가 될 뻔한 위치에 있었다.

자폐인 형을 극진히 돌보는 데다 정신병원의 보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헌신성과 윤리의식, 배짱을 보여준다.

 

편의점에서 라면과 김밥을 무심한 듯 툴툴거리며 챙겨주는 강태에게서 문영은 츤데레의 매력이 아닌 내면 아이의 욕망을 콕 집어낸다 .

"이쁨 받고 싶은 게 보여"라는 말에 강태의 얼굴, 즉 보호자로서의 페르소나에 균열이 간다.

 

제작진은 그 다음 장면에서 성인 문영과 어린아이 강태를 편의점 의자에 나란히 앉혀둔다.

아이는 자신을 칭찬하며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어른 앞에서 수줍어 한다.

그 순간 이후 강태에게 치유의 문이 열린다.

 

강태의 아킬레스 건은 두 가지다.

부모의 대물림, 그리고 죄책감.

 

강태 엄마는 남편을 사별하고 자폐 아동인 큰아들 상태를 끝까지 책임지려 성실히 노력한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로는 조숙하고 말 잘 듣는 둘째아들 강태인데, 그녀는 수시로 이렇게 하소연한다.

 

"사랑하는 아들, 너는 죽을 때까지 형 곁에 있어야 해. 내가 너를 그러라고 나았어."

엄마 품에 안겨 행복해하던 강태의 두 팔이 힘없이 늘어진다. 엄마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비 오는 날 우산 속에서도 강태는 엄마의 우산 아래 끼지 못한다. 엄마는 그냥 가던 길을 간다.

 

태권도 빨간 띠를 땄다고 신이 나서 뛰어들어오는 강태에게 엄마가 소리지른다.

"형 지키라고 없는 돈에 태권도 보내줬더니 형이 이 지경이 되도록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야?"

 

강태는 "형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소리지르고 뛰쳐나간다.

뒤따라온 형이 강물에 빠지자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다시 돌아와서 형을 구해내고 본인이 도리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는데, 이 때의 기억은 강태에게 치명적인 죄의식과 자기 의심으로 각인된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돌보는 자caregiver의 위치에 있었다.

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의 욕구불만 역시 내 몫이었다.

두 분이 싸우지 않는 날은 드물었는데 싸움이 있는 날에는 교대로 불려가 한 쪽당 몇 시간씩 감정적 위로와 집안 일을 맡았다.

 

열여덟 살 이후에는 돈을 벌어다주거나 집안의 사건사고를 수습하는 역할이 보태졌다.

동생들에게도 나는 부모 역할로 고정되었다.

 

30대 초반에는 아버지의 금전 사고를 수습하느라 억대의 빚을 졌다.

모아둔  돈을 털고 빚을 끌어오자 엄마는 그 돈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했고, 거절하니 길거리에서 차를 세우라고 소리지르며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후로 직장 생활 내내 빚을 갚았다.

가족들에게서는 수시로 번갈아 가며 전화가 걸려왔다. 돈을 보내라, 누가 어떤 사고를 일으켰다, 이런 내용이 주를 이뤘다.

수고했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소연의 대상, 불만과 분노의 대상이었다.

 

문강태의 치유에서 하일라이트이자 <싸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 전체의 하일라이트는 강태의 죄의식이 전면에 드러난 장면이다.

문상태가 뭔가에 자극받고 흥분한 상태에서 어린 시절 물에 빠졌을 때 동생이 자기를 버리려고 했던 장면을 끄집어내며 "동생이 형을 죽인다!"고 사람들 앞에서 소리친다.

 

무너져내린 강태가 벌벌 떨고 어린아이처럼 손을 싹싹 빌면서 "형이 기억 못하는 줄 알았어요. 잘못 했어요, 용서해주세요"라고 횡설수설 하며 운다.

 

강태에게는 자기만의 비밀이었던 저 죄책감이 존재 전체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잠재 의식에 은밀하게 뿌리내린 채 엉뚱한 행동 패턴으로 보상하려 든다.

강태의 경우 극단적인 선행과 참을성으로 스스로를 처벌하며 보상하는 것이 인생의 의식적, 무의식적 아젠다로 자리잡는다.

 

과도한 책임감은 구원자 증후군, 순교자 증후군으로 연결된다.

강태가 환자들이 휘두르는 칼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몸으로 받아내고, 형이 때릴 때도 가만히 맞고만 있는 모습 등에서 이런 심리적 구조를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증후군은 나의 아킬레스 건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천재"를 자처했다.

아버지는 나라를 구할 정치인이라는 자아상을 유지하면서 평생 정치 지망생으로 사셨고, 어머니는 그 와중에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낸 현모양처로서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이라고 소개했다.

 

두 분의 삶과 스토리텔링을 내가 평가할 수는 없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진실이 있게 마련이고, 내가 보기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나의 진실을 말하자면 뿌리깊은 혼란과 자기 의심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심어준 내면 가족inner family이다.

 

사춘기 이후 어떤 반항이나 거부 의사를 표시할 때면 부모님은 입장을 같이 하며 비난했다.

"배웠다고 부모 무시하냐" "부모가 돈이 많으면 니가 그 따위로 굴겠냐" "해 떨어졌는데 싸돌아다니다가는 순결 잃고 깨진 항아리가 된다" 등등.

나는 열다섯 살에 생리가 끊긴, 병원에서조차 보기 드문 조기 폐경 환자가 되었다.

대학생 때는 "아버지가 학교 못 가게 해서 발표날 못 왔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가 교수님의 불신을 샀다.

 

여기에 삶이 망가진 여동생과 군대 폭력 속에 세상을 떠난 남동생을 지키지 못한 나라는 죄의식이 덧붙여졌다.

어찌 됐든 나는 자격 없는 인간이라는 확인 사살 같은 거였다.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내면 아이 기법과 남동생의 채널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유다.

 

미국에서 만난 치유가, 영성가들 중에는 초면인 나에게 남동생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양의 힐러들은 보이지 않는 차원을 보고 듣는 싸이킥 능력이 쉽게 발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성서에서 "빛을 본다" "예언을 듣는다" 등의 표현을 접하고 자란 기독교 문화권의 특징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들의 묘사는 대체로 일치했다.

"스물 두살이라고 소개하는 젊은 남자가 네 옆에 환하게 웃으며 보디가드처럼 서 있다"는 식이었다.

 

수십 번의 기회 속에서 덜어지지 않던 죄책감과 냉소가 힐러의 도움을 받아 나 스스로 채널링을 했을 때 씻겨내려갔다.

 

"누나, 기억나? 나는 늘 누나 주위에 머물렀어.

밥을 먹을 때도 소파에 앉아 있을 때도.

나에게는 유일한 사랑의 공간이었어. 고마워.

누나가 가족들을 위해 항상 무언가를 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도와주고 싶었지만 도울 수가 없었어.

다른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는 게 참 이상하고 미안했어."

 

2014년 봄까지 내 삶을 이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비로소 자격 없는 인간이라는 덫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동생의 영혼은 이번 생의 목적과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 존재는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우리는 이전에도 함께 했고 앞으로도 만날 거야."

 

내 시야가 확장되었고, 나 자신을 용서했고,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로 도약했다.

 

이 사건 이후 그 어떤 힐러나 영성가도 내 동생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20년 만에 동생의 사진을 꺼내 책꽂이 한 가운데, 내 사진 옆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내가 만나는 클라이언트, 함께 일하는 힐러들에게서도 이런 유사한 이야기는 넘치도록 발견된다.

돈이 많든 적든, 지식과 타이틀이 짱짱하든 아니든, 집안이 내노라 하든 아니든, 이런 스토리가 없는 사례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가족"의 정의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 발버둥친다.

버티다 버티다 견딜 수 없어서, 거의 코마 상태로까지 가는 건강의 위기와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심 속에서 힐러를 찾는 것이다.

 

나의 역할은 단순하다.

가르치지 않고 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답이다, 저것은 틀렸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 세상의 가족은 모두가 달라요.

하나의 가족 안에서 구성원들이 인식하는 가족사도 모두 달라요.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선택하세요. 그것이 당신의 진실이 되는 겁니다.

객관적인 건 없어요.

 

이제 나는 한 인간으로서, 힐러로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냥 나 자신을 비롯한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경계선을 존중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하게 지킨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상태가 동생에게 씌워진 어머니의 목소리를 지워준다.

"문강태는 문강태 거. 형 지키는 사람 아니야."

 

강태는 친구들 앞에서 어리광을 피운다.

"나 원래 이런 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