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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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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일로의 치유와 성장

아, 정말 인생은 깜놀이야~

HaloKim 2020. 9. 30. 23:15

어제부터 뭔가 감이 오고 명료해지더니 오늘 새벽엔 퍼즐의 결정적 한 조각이 맞춰지면서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느낌이다.

 

열린 풍경은 기히 알던 것이다.

나의 삶, 나의 내면이니까.

 

그런데 이게,

한 실존의 사소하고 장대한 우주의 짜임새가 생생하고 선명하게 보인다.

 

보다see는 인지하다acknowledge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 퍼즐 한 조각은 모세에 대한 묘사다.

민수기 Numbers 12:6~9를 내 식으로 대략 번안하자면 이렇다.

 

"진리를 말하려는 자prophet가 있다면 이미지vision나 꿈을 통해 그에게 전달될 것인데,

모세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그는 모호함 없이 분명하게clearly 소통할 것이다.

왜냐면 그가 집 안의 모든 측면에 충실하기 때문이다he is faithful in alll my house."

 

기독교 영성에서 우주적 존재론을 설명할 때 "집house"이라는 비유를 흔히 쓴다.

커다란 집이라는 뜻으로 맨션mansion이라 칭하며, 많은 큰 집들many mansions이 있고 (John 14:1~2)

거주할 공간들 역시 아주 많다many dwelling places고 한다.

 

다차원, 다중우주에 대한 설명이겠다.

부처님은 주로 다양한 높이를 가진 산, 여러 개의 강, 그 강의 모래알 갯수만큼 많은 공간들로 비유하셨다.

 

무수한 다차원을 크게 묶어 7개의 층위로 나누기도 하는데seven mansions, 요즘 말로는 수퍼 우주Super Universes다.

 

그러니 모세가 "모든 집에서 충실했다faithful in all my house"라는 말은 다차원의 모든 의식 차원에서 신성/불성/자각 상태가 명료하여 마침내 창조의 핵심 원리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과 우주가 더이상 "수수께끼가 아닌not in riddles",  "가장 높은 차원의 형상을 본다see the form of the Lord"고 할 만큼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 비결이 "충실함faithful"이다.

존재의 모든 측면, 다차원의 모든 의식 차원에서 그는 깨달음/어센션의 원리를 충실히 통합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앞으로의 화두로 선택했다.

 

이어진 기도와 명상 중에 잊혀졌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썼다.

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무"와 "공"이라고 한자로 쓰인 책을 집어들었더니, 속은 말 그대로 텅 빈, 그냥 노트였다.

 

그걸 사들고 와서 내 일기장을 삼았다.

공 책으로 할 것인지 무 책으로 할 것인지 나름 심각한(?) 숙고를 거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기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고통의 끝에는 기도가 나온다.

 

나는 기도의 대상을 신으로 정했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God이라는 말을 쓰기 싫었다.

어디서 뭔 상처를 받았던 걸까.

 

God을 대체할 적당한 호칭이 없을지 사전을 뒤적이다가 신성, 섭리, 신을 뜻하는 Providence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그 다음부터 "나의 친애하는 신성이시여Dear my Providence"로 시작하곤 했다.

 

서두를 영어로 열다보니 일기 전체를 영어로 써보자 싶어 사전을 붙잡고 씨름도 했다.

내 최초의 영작문 연습이었다.

 

고등학교에서 학교 목사님이 불교 신자인 여고생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발을 꽝 구르며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을 본 후 나는 신이 없는 걸로 치기로 했다.

대학 가서 무신론 운동권에 소속감을 느끼다가, 내 안이 워낙 힘드니까 20대 후반에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평화를 이루어달라고 기도했다.

 

얼마 못 가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라고 가슴을 치며 기도할 때,

'진짜 내 탓인데 이러다 나도 죽겠구나' 싶어서 성당을 떠났다.

 

그 후로 구구절절,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선택했다고 생각한 영적 여정을 요약하자니,

열 네 살쯤의 중학생이 가족사의 고통으로 신음하며 혼자 은밀히 하던 바로 그 일이고 생각이었다.

 

종교가, 타인이, 목사님이 알려준 하나님이 아닌 나만의 신 개념을,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외롭고 막막한 지평에서,

나의 고통에 대한 답을 구하며 찾아나가기로.

그 끝은 평화가 되기로.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새벽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그 기억,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앞으로 나에게 펼쳐질 일들이 주마등처럼 촤라락.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필터를 얹지 않고 드리퍼에 바로 커피를 부어놓았다.

우유에 커피가루가 떨어진다고 해서 라떼가 되지는 않는다.

설탕과 유유를 적정량으로 혼합하여 데우는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우주적 존재론이고 뭐고 간에, 현실에 세밀히 정성을 다함faithful 을 놓친다면,

수천 번 반복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부터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자각을 했다.

 

 

삶의 순간들에 세밀히 정성을 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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