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김기덕대책위원회>가 있었다고 한다.
지속적인 폭력과 성학대를 자행했기 때문이라고.
상처 입으신 분들께 마음으로부터 깊은 위로와 치유 에너지를 보낸다.
이러한 작업은 나의 사명이자 직업으로서 평생 지속할 일이기도 하다.
또한 대책위원회의 활동에 감사한다.
스스로 멈추지 못할 만큼 가버린 사람은 여론과 사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치유가 필요했을 한 인간이 거장 행세를 하느라 버거웠나보다.
그의 깊은 내면에서도 멈출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겉으로 방어벽이 어떠했든.
누군가가 말한다.
그가 당신 앞에서 자상했다면 당신이 권력자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고.
그런 측면도 있겠다.
함부로 대접받지 않을 위치에서 만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한 인간이 타인과 맺은 경험의 결이 단순하지는 않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진출했을 때였다.
그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내 겉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검은 빛이 도는 진한 녹색의 개량한복 두루마기였다.
아무리 품이 넉넉하기로 여성용이라 그에게는 맞지 않았다.
감독은 "괜찮다"며 그 옷을 입고 단상에 올랐다.
그 날의 영광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국은 애증이 교차하는 나라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한국인이고 싶었던 것 같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한국-독일 공동제작을 성사시키고 난 뒤 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감독이 깜짝 놀라며 같이 올라가자고 권유했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영화가 해외에서 센세이셔널한 평판과 함께 엄청난 판매수익을 올리자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다.
공동투자배급에 반대를 하던 누군가는 자신이 주장했던 계약조건이 내 잘못이라는 리포트를 어떤 기관에 냈다.
(그녀는 훗날 내가 어떤 직위를 맡자 제 발로 찾아왔는데, 눈이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잠시 쳐다보다가 "잘 지내시죠?"라고 묻고 돌려보냈다.)
모두가 자신의 공을 자랑하며 기회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던 시절에 김 감독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씨 당신이 한 역할을 나는 알아요. 그 부분이 이 영화의 성공에 중요했어요.
프로듀서로서 30%의 역할을 해준 것인데, 기존의 한국영화계에 없던 일입니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30%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나머지 부분도 잘 경험해서 훌륭한 프로듀서가 되기를 바래요.
외로워 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이 한 일들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나는 고맙다고 간단히 인사했다.
이 통화 내용을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글 쓰고 공부하고 강의하던 영화인이 기획 프로듀서로 정체성을 탈바꿈하고 10년 동안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첫 걸음이었다.
서로의 길이 갈라진 후 지난 20년 동안의 김기덕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인간으로서나 감독으로서나.
다만 자기의 행위로 인해 지탄을 받다가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그를 위해,
나의 이런 기억을 남겨주는 것은 인연에 대한 예의이겠다.
잘 가세요,
김기덕 감독님.
그 때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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