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연결을 이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기도, 명상, 빛의 마스터 혹은 가이드의 직접적 개입, 직관적 앎, 에너지 다운로드, 사물을 통한 격물치지, 보고 듣는 형태의 채널링, 영적 텍스트를 독서하며 숙고하기, 내면아이 대화법, 꿈, 최면적 치유 기법을 이용한 동기화, 어떤 종류의 식물을 이용하기, 동물의 메시지 듣기 등등.
영적인 연결이란 나 자신의 평균적 의식 상태를 넘어서는 상위 차원의 의식에 연결되는connected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나온다.
1.
상위의 의식 차원은 무한하다.
나의 연결을 절대화하고 거기서 멈추면... 정말 큰 일이다.
2.
타인에게 "이것이 확실한 메시지이고 진리다"라고 말하면... 더 큰 일이다.
진리의 주관성, 상대성, 무엇보다 선택하거나 거부하거나 변용시킬 자유의지가 없는 진리는 처음에는 인간을 깨우치고 가볍게 만들어주는 듯 하지만 결국은 자유를 옭아맨다.
3.
아스트랄계, 즉 4차원은 보이지 않는 차원이면서도 모호하고 매우 혼란스런 영역이다.
물질 우주와 빛의 차원 사이에 걸쳐 있는 이 영역은 여전히 모든 이원론이 각축하는 장이다.
흔히 말하는 귀신, 혼란스러운 영혼들이 나를 도와준다고 나서거나 깨달은 체 하고 멍때리며 노는 곳.
그러므로 연결할 때 아예 5차원 빛의 영역에 의도를 두고 안전한 빛의 마스터를 청하는 것이 속 편하다.
나는 아예 예수님, 부처님, 관음보살님, 성모님 등 검증된(!) 존재들께 기도한다.
더불어 "나의 전 존재에 최고최선의 유익이 되는 선택을 합니다. 나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그 어떠한 것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라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오라장을 빛으로 뚜렷이 심상화 함으로써 시각적인 메시지를 나 자신에게 덧붙여 준다.
4.
영적인 연결/메시지는 나의 의식이라는 필터를 거쳐 통역된다.
즉 내 생각이나 상상, 인식 능력, 사전 정보와 구별하기 어렵다.
실은 이런 인식과 정보 체계가 없다면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예를 들어 산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에게 고등수학을 못 가르치는 격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것과 영적으로 주어진 메시지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 또한 주관적이고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통역 행위translation임을 아예 처음부터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또한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에게 섣부른 예언자 행세를 하지 않고,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리를 선택하고 해석할 자유를 열어두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고에 네 생각"이라는 냉소주의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과연 영적인 연결이라는 게 가능할까?
차원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다 자기 안에서 일으키는 망상이 아닐까? 의심이 올라온다.
실은 "망상"이라고 단언하는 분들도 많다.
영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1.
영적 연결인지, 내 안의 상념인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나의 치유와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해서 유익한 방향으로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치유법이라는 게 따로 있지 않다.
드라마가 우리를 깨우칠 수 있고, 노래 한 곡이 영감을 주기도 하고, 친구의 어떤 모습이 나에게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내 안에 있는 높은 차원의 가능성을 자극해서 나 스스로 잠재된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다양한 형태들이다.
자기 강화에 도움이 되는 모든 방법들이 치유법이고 영적 수행이다.
2.
해석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내가 성장한 뒤에는 해석이나 의미가 또 달라진다.
마치 봉우리를 오를 때 굽이굽이 깨우치며 가지만 정상에 오르면 전혀 새로운 맥락이 생겨나고, 다른 봉우리로 옮겨가면 그림이 또 달라지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 곱씹으면서 다양하게 해석하고 디테일이 풍부해지는 메시지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나는 "진리가真理價가 풍부하다"고 표현한다.
층위가 복합적이고 확장적인 진리가는 예를 들어 경전급 텍스트에서 흔히 발견된다.
성경, 불경, 도덕경이 마르고 닳도록 읽히는 이유다.
"100겹의 의식으로 인코딩 되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3.
자기 의심과 확신이 늘 혼재한다.
이 과정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데, 원래 진리는 이렇게 찾아가는 것이라고 모든 성인들이 말한다.
그들의 여정 또한 예외없이 그러했음을 남아있는 자료와 문헌, 경전들이 증거한다.
절대 반지, 절대 진리를 구하려는 시도는 항상 좌절한다.
절대 반지를 선언하는 사람/학문/종교/시스템이 늘 세상에 가장 큰 불행과 폭력을 불러왔다.
자기만의 진리를 찾는 여정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지, 그 결과물은 무엇이든 무상하다. 천변만화.
무상한illusionary 것들 속에 내포된 가물가물한 보편적 진실을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찾아나가는 것.
그것이 어센션/깨달음의 길이다.
거기에서 창조주의 참된 모습을 언뜻언뜻 만난다.
ps.
친절한 성모님.
요즘 나의 영적 연결은 새벽에 기도와 짧은 독서, 일기쓰기, 명상, 치유로 이루어진다.
일기는 질문과 답변 형식을 띠는데 요 며칠 성모님께서 응답하신다.
그런데 나는 자기 의심의 병이 깊고도 깊은 유형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한 걸음의 자기 확신을 위해서 아홉 걸음의 의심을 거친다.
예전에는 그 비율이 1 대 100쯤 되었으니 그나마 많이 치유돼서 이 정도랄까.
성모님의 응답은 영어로 주어진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한글은 능숙하니까 "만고에 내 생각"이라고 의심하기 쉽다.
그런데 영어로 적다보니 평소에 내가 쓰지 않는 어휘가 튀어나오거나, 익숙한 단어인데 용례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들, 심지어 명백히 문법에 맞지 않는 이상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이 또한 강박적으로 사전을 찾거나 문법 오류를 바로잡았다.
그러니 의심이 더 깊어졌다.
요즘은 일단 쓰고 나중에 사전을 찾아가며 숙고해본다.
놀라운 지혜가 튀어나온다.
오늘 내가 걸려넘어진 단어는 "stay".
나는 이 단어를 "머무르다"라는 뜻의 자동사로 늘 사용해왔다.
그런데 "only when you're stayed"라는 표현이 오늘 아침 일기 쓸 때 등장했다.
그 다음에는 "in stay" 즉 명사도 적었다.
자동사, 타동사, 명사 전부 다 사전에 있는 용례다.
비로소 내가 적은, 어쩌면 성모님의 메시지일 지도 모르는 오늘의 일기를 조금 더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었다.
자기 의심이 깊은 자여. 고생 죽도록 할 지어다.
'헤일로의 치유와 성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확한 인정 (0) | 2021.01.23 |
---|---|
자기 확신의 여정 (0) | 2021.01.16 |
원래 이렇게 크는 거구나 (0) | 2021.01.05 |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는 창조주인가? (0) | 2021.01.05 |
에세네와 팔레스타인 - 덜 알려진 이야기, 그리고 꾸며낸 이야기 (0) | 2020.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