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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문답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HaloKim 2018. 12. 9. 01:41
저 유명한 시조 구절을 이러한 치유적 격언으로 바꿔 보고 싶습니다.
“사랑을 구하는 마음이 몸에 병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다시 온 생이 전전긍긍 이로구나.”

사랑은 삶을 유지하는 소중한 원동력이자 목표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에 조화가 깨지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모든 질병이 심리적인 데서 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다정이 병이 되는" 유형을 예로 들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애정 결핍 유형입니다.

성장기에 적절한 양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 떨어집니다. 삶의 기술이란 타인과 관계 맺는 능력입니다.

특히 가정이 여러 모로 잘 돌아가지 않는 집안multi-dysfunctional family 에서는 부모의 심리 상태가 자식을 키운다기보다는 스스로를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라서, 슬하의 자식들은 겨우겨우 버티다가 세상으로 튕겨져 나옵니다.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함에도 인간 관계는 늘 파국을 달고 다니며, 사회 생활에서도 안정감 없이 부평초처럼 흘러 다닙니다.

외로움이 지나쳐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고통으로 느껴지고, 결국에는 경제적인 생존 불안에 직면합니다.

결국 자신을 구원해 줄 한 사람을 찾아 나서지요. 대개는 사랑의 이름으로, 때로는 권위자를 찾아서.

구원자(애인, 남편, 선생, 직장 상사 등)로 선택 당한 한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말 그대로 “몰빵” 합니다.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요.

“내가 당신에게 이만큼 가치 있어요. 그러니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버리지 말아줘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독점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당신이 그렇게 대접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망가뜨리겠어요.”

이 무서운 인정 투쟁 다음에 분노와 희생자 의식이 따라 붙습니다.

“이 나쁜 **야. 내가 너에게 그렇게 했건만, 너는 고작 이 따위야? 나는 너를 망가뜨릴 수도 있어. 아니야, 나를 버리지 말아줘. 아니, 난 너를 버리겠어. 아니, 너 없이는 못 살아. 난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아이고, 내 팔자야.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있는 거야? 내가 뭔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내 인생이 이런 거냐고? 신이 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모든 게 불공평 하잖아!!!”

몸에 탈이 나는 것은 시간 문제겠지요. 병원에서 진단받는 각종 질병 뿐만 아니라, 병명도 원인도 찾지 못하는 이러저러한 육체적 고통까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입니다.

애초에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시작했으면서, 그 관계의 특징을 잘 알고 있으면서, 혹은 소망 충족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고 이상형의 지위에 올려둔 채 낭만적인 사랑으로 포장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면서, 이 관계를 끝내야겠다고 스스로도 여러 번 생각했으면서, 어떤 우발적인 계기에 상대방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상실감, 배신감, 미련, 분노, 무기력, 우울증 등을 포함하는 비통함grief 단계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런 싸이클은 필연적으로 반복됩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다른 이의 삶 전체, 그것도 분노와 집착에 기초한 존재의 무게를 떠안고 오래 버틸 수는 없으니까요.

이 모든 스토리의 핵심 모티브는 애정 결핍입니다. 애정을 갈망하는 내면 아이의 투쟁이 온 인생을 지배하는 겁니다.

불교 심리학에서는 이같은 “갈애”의 심리 상태가 오르락 내리락 하며 자신과 주변에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모양새를 “지옥도-아귀도-축생도-인간도-아수라도-천상도의 6도를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치유는 이 스토리의 근본 원인을 이해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치유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동안 탕진해온 모든 사랑의 에너지를 자신에게 먼저 주도록 돕는 과정이지요. 그래야 다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다정도 병”이 되는 두번째 유형은 책임감 증후군입니다.

이 유형이 탄생하는 배경 또한 첫번째 유형과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가족을, 타인을, 세상을 도와주고 구원해주느라 인생을 다 건다는 점에서 방향이 약간 다를 뿐이지요. 결국에는 헛바퀴 돈다는 점에서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잘 돌아가지 않는 가정의 부모는 어느 자식 하나를 이런 유형으로 길들입니다. 장남/장녀, 심성이 착한 자식, 능력이 뛰어난 자식이 주로 그 대상입니다. 자신의 불행을 그 자식에게 끝없이 하소연 하는 거지요. 배우자를 욕함으로써 어린 자식으로 하여금 자기 편에 서서 위로하게 만드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런 자식은 부모의 감정적 배우자emotional spouse 노릇을 하며 성장하게 되고, 당연히 타인의 아픔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공감하며 위로하는 능력이 발달합니다. 어린아이가 주는 위로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달콤하지만, 그것이 아이가 내내 할 일은 아닙니다.

마침내 아이는 부모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불쌍하고 희생당하면서 나를 위해 살아준 엄마 혹은 아빠”라는 시나리오를 받아들이면서, 어느 한 쪽 부모를 증오하고 다른 한 쪽 부모를 책임지는 것이 자신의 의무obligation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아이의 깊은 내면에서는 진실을 알고 있어요. 아이는 논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 어른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희생자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부모 또한 다른 한 쪽 부모 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자신에게 악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을 잠재의식 차원에서는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연민과 증오가 교차합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부모의 재정적 배우자, 가족 전체의 부양자 노릇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책임지지 않던 부모는 나이 들수록 더 여러 측면에서 자식에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공감하고 돌보는 능력이 발달한 채, 사랑하기 보다는 연민과 증오의 마음을 바닥에 깔고, 나보다 약해 보이는 누군가를 책임져주는 것이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 의무라고 생각하는 내면 아이.

그 아이는 어딜 가나 도와줘야 할 사람을 기막히게 알아봅니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으쓱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늘 이런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니까. 나는 사랑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야."

어느 날엔가는 본인이 지치고 외로워서 거리를 헤매더라도, 돌봐달라고 징징거리는 “에너지 뱀파이어”의 눈에 당신은 탁 걸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에너지의 작용이니까요.

당신은 아마도 그들에게 수십 번 선언했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끝이야.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거지? 나는 지쳤어. 죽을 것 같아. 정말이야. 제발 내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줘…!”

그럴 때 당신이 구원하려고 애쓰는 그 “찌질한 약자”들의 눈빛을 눈치 채셨나요?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은 화가 풀린다는 걸 잘 알아. 나는 그 기술을 수십 가지 가지고 있다구. 지금은 화가 풀린 걸까? 이제 애교를 떨며 부탁을 할 때다. 아니라고? 이런이런. 힘들어 죽겠다고 자빠질 때로군. 좀더 아파야겠어. 오케이, 넘어 오고 있어. 나는 똑똑해. 역시 너는 내 손 안에 있구나.”

당신은 다시 한번 돌보는 이의 역할, 책임감 증후군의 덫에 빠져들면서 스스로에게 속삭입니다. “그래, 나는 착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야. 이것이 나의 운명이야. 저들도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내가 더 열심히 잘 해서 좋은 모범을 보인다면 말이야. 신께서 알아 주실거야.”


그 결과가 어떨 것 같나요? 나는 치유실에 앉아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매일 듣습니다. 똑같은 레파토리를 연주하는 수많은 다른 이들의 노래소리를.

나는 그들을 “빈사의 백조”라고 부릅니다. 백조가 죽어가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지요.

이들은 마음 깊이 알고 있습니다. 가족이, 타인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자신은 그렇게 희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희생합니다.

더이상 견딜 수 없어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물러나는 방법을 모릅니다. 마침내 몸에 병이 걸릴 때까지.

질병이 방어막이 되어줄 때까지 단지 멈추는 방법을 몰라서 달리고 달립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질병은 대체로 심각합니다. "당신들을 도울 수 없는 확실한 이유"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책임감 증후군이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핵심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도리라고 믿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도 참된 사랑은 없습니다. 격렬한 분노와 고통이 억눌린 채 책임으로 덧칠하고 덧칠합니다. 마침내 자기 자신의 삶이 검게 물들 때까지.

치유의 핵심은 그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그 믿음의 허구성을 일깨우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삶의 패턴이 즉각 바뀌지는 않습니다. 허탈함, 분노, 무기력증이 찾아오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하던 대로 반복하게 됩니다.

나는 이것을 마약 중독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자신을 바꿀 힘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반복할 뿐임에도, “오케이. 나는 치유되었어. 그러니 이해하고 용서하겠어. 사랑이 전부잖아?” 이렇게 포장을 하지만, 실상은 상호 종속적co-dependent이고 자기 파괴적인 패턴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중독 증상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 하지요. "치유와 성장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요?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예요? 난 절망이예요. 신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나에게 똑같은 잔소리를 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처럼 잘난 사람이 아니예요."
나는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이런 목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이나 그렇게 사시오. 나는 바꾸고 싶지 않아. 변화하는 방법 따위는 배우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던 대로 해서 끝장을 볼테니. 두고 보라지. 내 방식으로 살고 말테야.'

오만함과 열등감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울부짖고 질문할 때마다 나의 답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치유도, 신도 당신을 구원하지 않아요. 스스로를 일으키겠다는 당신의 의지가 당신을 구원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조력자예요."


"다정도 병인 양 하는" 그대에게 나는 말하겠습니다.

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철저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오직 그런 사람만이 진실로 타인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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