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바디® 힐링 하면서 어센션을!

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함께 천천히 걸어보아요

치유 사례

미스터 션샤인 - 유진 초이의 내면 아이

HaloKim 2018. 8. 14. 02:38

이 드라마가 시작할 때의 첫 장면은 언제나

어린 유진이 소나무 숲 바깥으로 정처없이 내달리는 모습이다.
 
하필 이 장면을 선택한 제작진의 의도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그간의 내용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되돌아온 직후의 유진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어린 시절의 사건을 되새기는 데 골몰했다.
 
“노리개를 찾아 복수를 하러 갈까,
사발을 찾아 은혜를 갚으러 갈까,
그도 저도 아니고 밥이나 먹으러 갈까”
 
이러면서 공사관 뜰 안에 멍때리고 있거나
과거의 사건이 있었던 곳을 향해 말을 타고 내달린다.
 
소나무 숲에서 말 타고 달리는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되는데,
어린 유진이 벗어나고자 달리는 장면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되돌아오고,
벗어나고 싶지만 또 되돌아 오고.
 
애신과의 “러브”를 포기하려 했을 때는
"내가 조금은 달려졌다고, 조선도 좀 달라졌으리라고 믿었는데
나는 아홉 살 때 몸을 숨겼던
작은 상자 안에 아직도 갇혀 있는 듯하다”
고 독백한다.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후군이다.
트라우마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토록 정확한 비유로 묘사하기도 쉽지 않다.
 
아홉 살 때 유진의 가족에게 벌어진 사건은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다.
 
그 이후의 삶은 이 트라우마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삶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자신이 벗어 났다고 믿지만,
가해자도 조금은 달라졌으리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내 삶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깊이 절망한다.
 
물론 상처 자체는 잠재 의식 안에 깊이 묻혀 있다.
그러나 상처의 여진을 둘러싼 끝없는 왕복 운동이
당사자의 존재 양식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트라우마 자체를 치유하기 전까지는
이 패턴이 결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또 다른 주인공 구동매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어린 시절에
유진과 같은 끔찍한 비극을 경험한다.
사회의 모순을 극단적으로 함축하는 장면이다.
 
그는 일본으로 도망가 칼잡이가 되는데,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트라우마의 현장을 맴도는 것이었다.
구동매답게 칼을 휘두르며.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딱 한 번
조건 없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애신의 주변을 맴돈다.
“백 번을 돌아서도 이 길뿐”이라는
애달픈 고백과 함께.
 
이러한 패턴은 치유실에서 늘 관찰되는 현상이다.
모든 치유 작업이 거시적으로 보면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상처가 크든 작든 예외 없이.
본인이 기억하든 못 하든 상관 없이.
 
치유란 이 상처를 안전하게 열고 들어가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몸 치유든, 마음 치유든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사자에게는 삶 전체를 재편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예상컨대, 유진과 동매는
트라우마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소할 것 같다.
 
이 가능성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과 상관이 깊다.
조건없는 사랑의 손길이
어린 시절에 있었느냐의 여부가 또 다른 변수인데,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에게는 그런 경험이 주어졌다.
 
이런 결론은 트라우마-내면아이 연구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본격적인 현대 치유가 발달하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서구에서는
성장기와 성인기를 추적 조사하는 연구 또한 축적되고 있다.
 
어려운 환경 혹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은 어린이들 중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데,
 
그 차이는 단 한 가지.
어린 시절에 한 번이라도 사랑의 손길을 경험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진은 도공 은산과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다.
동매는 애기씨의 가마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이 드라마에는 또다른 치유 원리들도 담겨 있다.
-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하려는 당사자의 의지와 용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 가해자의 정체와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명되어야 한다는 것
- 사랑과 조건없는 지지를 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진과 동매는 자기 상처의 자리를 찾아 제 발로 되돌아온 사람들이다.
또한 무엇이, 누가, 자신의 삶을 파괴했는지
명확이 알고 있고, 그것에 도전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는 폭력을 포함한다는 것이
실제 치유와는 다른 면이지만,
 
현실적인 치유 현장에서도 “분리separation”와 같은
“거친 사랑tough love”의 방법론이 필요할 때가 많다.
 
두 사람에게는 치유의 조력자들도 있다.
 
유진의 마음이 다시 닫히려 할 때
“자고 가라”며 방에 군불을 때주는 도공 은산 앞에서
유독 어린애처럼 서럽게 운다.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물론 유진의 회복에 결정적인 사건은
애신과의 사랑이다.
 
그렇지만 연애가 치유를 단순히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서로의 상처를 할퀴고 증폭시킬 뿐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둘 다 혹독한 심리적 갈등을 겪는데,
 
이 갈등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내적 성장을 성취한다.
이 성장이 서로를 치유한다.
 
첫 출발은 유진이 던진 정직한 질문이다.
 
“맞소. 나는 노비의 자식이오.
당신이 구하고자 하는 조선에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그는 이 질문이 둘을 갈라놓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숨기지 않고 묻는다.
 
애신 역시 길고 고통스러운 숙고를 통해
자신이 믿어왔던 정체성과 세계가 마음 속에서
완전히 무너졌음을 인정한다.
 
“나는 귀하가 당연히 양반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소.
내가 투사라서 다른 양반들과는 좀 다르다고 믿었는데,
아직도 꽃가마 바깥으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애’였을 뿐이오.
그러니 나로 인해 상처받지 마시오.”
 
이 과정을 거쳐 둘은
- 그 무엇보다 자신을 직시하고
- 서로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존중하며
- 과거의 비탄에 매여 원망을 반복하지 않고
- 미래를 두려워 하느라 걸음이 마비되지 않고
- 현재에 충실한 채
- 삶을 즐기고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현재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바꾸는
치유 작업의 비결이자, 강력하고 아름다운 힘이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집단적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 드라마가 독립운동을 다루는 데 있어서
진일보한 관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다.
 
동매의 상처는 약간 더 복합적이다.
 
자기에게 내민 조건없는 도움의 손길을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애”라며
날카로운 말로 난도질 했는데,
이것이 그의 내면 아이에 자리잡은 죄의식의 근원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훨씬 현실적일 수 있다.
상처입은 자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순둥순둥 반응하리라고 기대한다면
순진한 환상이다.
 
그래서 힐러 자신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끝없이 성숙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서로 얽혀 돌거나,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동매와 애신이 결국에는 화해하리라고 예상한다.
동매가 자신의 죄의식을 직시하고 있으며,
애신이 자신의 한계를 성찰하기 때문이다.
 
<미스터 션샤인>은 매우 중층적으로 읽히는 텍스트이다.
누군가는 시대상을,
누군가는 가슴저린 멜로를,
누군가는 내면아이 치유를,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성숙한 연기와 연출, 제작을 즐길 수 있다.
 

 

고마운 재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