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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 세상

세 가지 알약 - 사랑의 불시착, 킹덤, 싸이코지만 괜찮아

HaloKim 2020. 8. 23. 10:30

나에게 대중 문화는 세상을 읽는 지도다.

때로는 뛰어난 개별 작품을 통해서, 때로는 어떤 경향들이 흘러다니는 전체적인 지형도를 통해서.

 

지난 1~2년 동안 화제가 된 드라마 시리즈 중에 세 가지를 최근 연달아 보았거나 보는 중인데, 심상찮은 지도가 그려지는 느낌이다.

<사랑의 불시착> <킹덤> <싸이코지만 괜찮아>

 

장르와 스타일은 다르지만, 셋 다 한국의 현실과 집단적인 소망, 문제 의식, 공포를 여실하게 그려낸다.

이들을 합하면 한국 사회를 입체적으로 인식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또한 미래를 어느 방향으로 선택할 지, 네오의 세 가지 알약을 보는 느낌이다.

 

더 중요한 것.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알약을 선택해서 복용했다.

 

 

1. <사랑의 불시착>

 

가장 낭만적인 시대 정신과 비전을 펼쳐보인다.

 

한국은 풍요롭고 세련되었다.

사람들은 적당히 이기적이고 철이 없지만, 근본 심성이 착하고 박애주의적인 정신도 갖고 있다.

 

북한을 그리는 방식은 애끓는 한민족이라는 낭만-신파 서사라기보다는, 같은 언어를 쓰는 특수한 이웃 국가 정도로 느껴진다.

실제로 아시아의 시청자들 대부분은 드라마 속 북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한국을 선망하는 심리적 구도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가까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의욕에 넘쳐 미국과 일본을 롤 모델 삼고 서유럽을 동경하며 열심히 추격해왔다.

이제 보니 어쩌다 우리 경제와 문화가 전 세계의 맨 앞 줄에 서 있는 것을 자각한다.

 

조금은 오만하지만 반성도 빨리 하면서 그 역동성을 착하게 쓰고 싶어 한다.

통일도 상식적, 순차적으로 해서 남 좋고 북 좋은 식으로 지혜롭게 나가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한때 우리에게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지도를 제공했던 나라들의 작금의 현실을 이리저리 보고 들으면서,

아차차! 그냥 따라가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한국인 특유의 촉과 눈치도 깨어나고 있다.

 

경제와 문화의 전 분야에서 한국의 위세는 거침이 없고, 탑을 찍으면서 흐름을 선도하는 분야들이 속속 추가되고 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특히 최근 10년간 시민 사회의 정치적 각성, 치유와 영성의 용틀임은 나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는 요소다.

 

주류 언론에서는 왠 일인지(?) 보도를 안 하지만, 똑똑한 유투버들이 부지런히 소식을 실어나른다.

지금 "헬 조선"을 떠나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후라이팬에서 튀어나와 끓는 기름통으로 들어가는 격일지도 모른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고, 현재의 정부를 지지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지만,

이 흐름을 놓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과소평가 하면 시대의 격랑에 뒤쳐질 것이다.

 

 

2. 킹덤

 

"우리 꽃길만 걸어요!"

어여쁜 걸그룹 처녀가 이렇게 인사하곤 했지만, 현실이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이 인사말이 찡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꽃길과 아마게돈은 공존, 병존한다.

현실이란 언제나 고도로 복합적이다.

 

더이상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썩어문드러진 병리 현상과 시스템의 약점이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근본까지 무너뜨리는 현실,

그것을 이기심과 탐욕으로 찍어누르는 권세가들, 거기에 논리랍시고 궤변을 제공하는 곡학아세의 무리들.

솔직하게 직면하며 사람과 시대에 함께 하고 싶어하는 소수의 깨어있는 정치인과 그들이 당하는 치명적인 위협.

 

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것이 18세기 조선이다.

 

영조-사도세자-정조로 이어지는 백 여년의 왕실 판세가 <킹덤>을 비롯해서 현재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사극에 차용되는 이유일 것이다.

노론은 오늘날 친일파를 뿌리로 둔 기득권 적폐세력으로 어렵지 않게 등치시킬 수 있다.

 

왕실과 사대부-양반은 그 뿌리와 목적이 같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왕실이 민본주의 성향을 띠고, 사대부 정치인들이 양반 기득권을 대변하면서 치열하게 갈등한 시기가 드물게 존재한다.

 

한글 창제기의 세종, 임진왜란 수습기의 광해군, 그리고 정조 시대가 그랬다.

특히 정조 시대는 현재와 직결된다.

 

그는 뛰어나게 성공적인 계몽군주였다.

 

할아버지의 분열증, 아버지의 비참한 몰락, 본인에게 평생토록 가해지는 정치적 위협을 뚫고 생물학적, 정치적으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하면서도 정치적 보복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비전은 화성 천도라는 형태로 정점을 찍기 직전에 의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19세기 백 년은 뛰어난 왕, 즉 위협적인 정치적 라이벌의 등장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노론 사대부가 이끌어갔다.

그 결과를 우리는 뻔히 알고 있고 지금도 그 영향을 받는다.

 

20세기의 비전은 동학 혁명 vs 대한제국이 충돌했다.

일본군을 끌어들여 우금치에서 농민군을 학살한 왕실은 나라를 지켜내지 못했다.

식민지, 분단, 전쟁,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는 강대국의 혹독한 눈치밥.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의심한다.

노론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이 이해 관계를 위협받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바이러스"를 퍼뜨려 백성을 죽음에 몰아넣고, 그 좀비들을 이용하고, 정 안되면 내어주기 보다는 자폭을 택할 지도 모른다고.

 

역사에서 엄연히 보아온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8.15 광화문 집회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고 대통령을 탄핵하겠다며 결과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확산시키고,

태극기와 성조기, 일장기를 이어붙여 흔드는 모습을 보며 저 세기말 동학농민군의 공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을 단순히 진보 시민들의 피해망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킹덤>의 좀비 공포가 단순히 드라마적 환상에 불과한가?

 

극의 주인공 이창은 사도 세자 혹은 세손 시절의 정조를 연상시킨다.

<킹덤> 시즌 3에서는 작가의 정치적 소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창은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미치광이의 낙인이 찍힌 채 죽을 것인가?

살아남아 새로운 정치의 주역이 될 것인가?

 

작가는 아마도 그 다음 질문과 답변을 우리 몫으로 남길 것이다.

 

설혹 이창이 이산(정조)의 길을 간다 하더라도, 한 정치인의 제거와 더불어 산산조각 난 꿈으로 남길 것인가?

미지의 길을 찾아나가며 역사적, 문명사적 전환기를 선도하는 한 무리의 별빛이 될 것인가?

 

 

3. 싸이코지만 괜찮아

 

이 드라마의 강렬한 인상은 두 가지다.

 

젊고 세련된 대중 문화의 감각이 유려하게 직조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K-컬처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상황과 대사가 치유를 위해 주도면밀 하게 설계된 본격적인 치유 드라마라는 것.

 

특히 "본격적"이라고 강조하는 지점은 가족이 공포의 공간이자 근원으로 적극 제시된다는 데 있다.

 

내가 본 기존의 한국 드라마가 가족을 제시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랬다.

 

- 가족이 깨끗하게 배제된 환상의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젊은이의 꿈과 사랑 (주로 미니시리즈 멜로드라마)

- 소시민 대가족이 갈등과 애환, 삶의 재미를 나누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풍경 (주로 주말극, 저녁 일일극)

- 막장 가족에 대한 격정적인 감정 풀이 (주로 아침 일일극)

- 부자, 권력자들의 위선적인 가족 관계에 대한 비판적 폭로와 조롱 (가끔씩 나오는 기획 특별 드라마)

- 과거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통해 잃어버린 인간성 복원 (가끔씩 나오는 기획 특별 드라마)

- 중산층 엘리트 가정의 부부 관계, 자녀 교육의 실상을 바탕으로 섬세한 심리 묘사 (가끔씩 나오는 기획 특별 드라마)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가족 드라마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공유되는 대전제가 있다.

인간의 생노병사에 관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가족이 진다는 "가족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은 맞는 말인 동시에 무서운 기만이다.

 

가정은 한 개인에게 사랑의 기억, 상처의 흔적, 힘과 약점 등 삶을 살아가는 모든 조건을 주조mold시켜 내보내는 원형틀이다.

따라서 가족 안에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 인간사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러니 가정을 선한 사람 vs 악한 사람 혹은 좋은 가정 vs 나쁜 가정으로 대비한다면 매우 유아적인 발상이다.

빛도 있고, 어둠도 있고, 모호함과 양면성이 모두 있다.

 

주인공 강태의 어머니는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도 자폐아 아들을 단호히 책임지려는 선한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착하고 조숙한 둘째아들이야말로 유일한 삶의 희망일 것이다.

 

그 아들을 껴안고 어머니가 말한다.

"너는 죽을 때까지 형 옆에 있어야 돼. 내가 그러라고 너를 낳았어."

 

그저 어머니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어린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가 두 팔을 힘없이 떨어뜨린다.

 

한 인간의 존재 가치가 마치 다른 한 인간을 돌보고 희생하는 데 있는 것처럼, 그것을 해내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고 실패한 인생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아동 학대다. 

 

부모와 형제에 의한 이런 식의 아동 학대는 흔히 벌어진다.

여주인공의 엄마처럼 사랑을 빙자해 통제하고 억압하는 어머니는 단순히 과장이거나 특수한 경우라고 말할 수 없다.

자녀를 숨막히게 덮어쓰고 감시하는 어머니를 치유학에서는 "헬리콥터 엄마" "담요" "타이거 맘" 등으로 지칭한다.

 

끔찍한 아동 학대, 아동 성폭력의 80%가 가족 내에서 벌어지며 가해자의 대부분이 친부, 친모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동화적 서사, 호러 장르를 빌어 이런 가족 내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기존의 가족관을 해체했다.

 

그런데 강태의 어머니는 죽은 남편의 제사상 앞에서 왜 소주를 마시며 아들에게 저렇게 말해야만 했는가?

사회가 인간의 양육과 돌봄에 대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은 부모와 형제가 진다.

그래서 가장인 남편/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면치 못한다.

 

반대로 이 모든 책임을 감당해온 부모들은 자식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평생동안 따라다닌다.

 

이는 당연히 컨트롤 욕구로 이어진다.

내 뜻대로 안되면 불안하고 화가 나고 배신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여주인공인 고문영의 부모는 아마도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아동문학가인 그녀는 유능하지만 정서적으로 무감각한 "괴물"이다.

 

감정체를 극심하게 손상당한 것이다.

부모가 준 것이 사랑이 아닌 아동 학대였다는 뜻이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부모나 약한 형제를 돌볼 의지도, 감정적 능력도 없다.

병약해진 부모는 양로원이나 요양 시설로 가거나 정부의 복지와 의료에 기댈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형제자매는 능력있는 부모형제의 민폐이자 비밀스런 수치가 된다.

 

원래 결혼을 하는 모든 이들은 제각각의 상처를 안은 불완전한 사람들이며, 부모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역할을 배워야 하는 정체성 위기다.

그래서 아이 양육을 부모 손에만 맡기는 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한 아이를 기르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어떤가?

이래도 가족이 인간의 생노병사를 몽땅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가?

 

한국 사회가 인간의 근본적인 생존을 돌볼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진실로 믿는가?

그런 정부 지출이 복지 포퓰리즘이고 나라 망쳐먹는 빨갱이 좌파 정책이라는 비판은 진심일까?

 

<싸이코지만 괜찮아>는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가족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비로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가족은 호적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말에 이 드라마의 취지가 담겨 있다.

 

혈연의 부모라도 심각한 침해와 학대의 당사자인 경우에는 단절과 분리를 선택하며, 

혈연과 무관하게 삶의 결을 함께 하며 공감과 지지, 위로를 나누는 사이를 사실상의 가족으로 호명한다.

 

 

4. 이 글을 쓰는 이유

 

내가 만약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이들 드라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 알약을 받는다면, 세 알을 모두 삼키겠다.

그 어지럼증과 혼돈, 공포를 견디고 정신 바짝 차려 자각하면서 비틀거리는 한 걸음을 내딛겠다.

살아있는 내내 꾸준히.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을 사람들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는 나와 같은 길을 걷는 힐러들이 있다.

살면서 내가 직접 겪은 인간들 중에 가장 진솔하고 치열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당당히 미워하고 싫어한다.

그럴 만한 가치와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부류는 주로 SNS와 유투브에서 발견한다.

그들이 나의 가까이에 있거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드러내는 모습이 전부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모습이 진솔한 일부라는 것은 여실히 느낄 수 있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견문을 넓힌다.

 

정치적 진보주의 시민들, 나와 방법론은 다르지만 자기 분야에서 헌신하고 성장하는 힐러들, 양식있는 학자와 종교인들, 농사든 금융이든 자기 분야를 치열하게 책임지는, 현실에 뿌리내린 전문가들, 자기 성찰의 깊이가 지극한 개인들, 활동가들, 예술가들, 정치인들, 언론인들 ...

 

나는 그들을 영성가, 영적 진보주의자라고 내 식대로 통칭하며 이들이 진보적 시민사회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 힘이 <킹덤>의 아수라장을 견디고 있다.

최대한의 의지와 의식으로 빛과 평화, 통찰의 씨앗을 나누어준다.

 

나는 동료 힐러들과 영적 진보주의-실천주의 시민들(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존칭) 덕분에 살아간다.

현실에 별 관심이 없고 극도의 이상주의와 과대망상적 실천주의에 매달리는 나는 그들이 없으면 세상에 헌신할 미련이나 가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나-그들-우리들의 소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그 사이 어디쯤에서 끝날 수도 있다.

그 지점이 어디이든, 우리는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울컥, 감동할 때가 많다.

 

"당신들의 고군분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