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업무 중에 일처리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담당 직원과 대화가 이어지게 되었다.
독립된 공간에서 넥타이 정장 입고 일하는 뱅커banker는 이런저런 소소한 말을 하다가 어떤 숫자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숫자와 공간을 이해하는 지능이 많이 떨어진다.
한국 시차 같은 단순한 계산을 수천 번 반복함에도 자주 틀린다거나, 실내 공간에서 화장실과 방문, 출입문 방향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코드로 전환을 시켜야 되는데, 몇 백번 반복한다고 해서 외워지는 건 아니고 실수가 드러날 때까지는 스스로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은행원의 숫자 이야기를 머리 속에서 의미로 조합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자기한테 돈을 좀 맡겨두라며 여러 옵션을 제시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한 돈이 없다.
이 대화를 어떻게 정리할까?
i) 나는 돈이 없어요 ->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하는 실망을 안기겠네
ii) 나는 숫자를 잘 못 알아듣는 특이한 머리를 갖고 있어요. -> 뭐래니, 짜증나게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었네요."
뱅커의 표정이 바뀌었다.
"의사는 간단한 거랬는데 암튼 상황이 유동적이예요. 한국에 곧 출장도 가야하고.."
그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로 "아, 그래요? 잘 회복하시기 바래요. 언제든 연락주시구요"라고 친절하게 작별해주었다.
일어서는데 마침 가방이 아픈 데를 건드려서 움찔 했다.
"가방 들어드릴까요?" 묻기에 "괜찮아요" 라고 답한 뒤 허리를 세우고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진실이든 배려든 그가 뭐라도 알아차렸으리라 믿는다.
사족.
1. 나는 역시 속빈 강정이구나 (음.. 강정은 맛있는데..)
2. 요즘 왜 돈 전문가들이 나에게 친절한 걸까. 심지어 "우리는 사람 딱 보면 알잖아요"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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