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여 먹다가 오래 전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장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데 미국인 젊은이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 사람이냐고, 자기도 한국 회사에 다닌다고.
유명한 한국 라면 회사였고, 미국 지사 혹은 생산 공장에 근무했던 것 같다.
미국 생활이 몇 년 지나지 않은 때라
나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이 나와 말을 트고 지내자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몰랐었다.
결정적으로, 라면 많이 먹느냐고 인사차 물었더니
그는 "나트륨이 엄청 들어간다"고 대답했다.
찰나지간에 그의 눈빛과 표정이 아주 미묘하고 복잡했는데
"내가 너희 쪽에서 벌어먹고 산다만, 너희들의 어떤 것도 동의하지 않아"
라는 뉘앙스랄까.
젊은 백인 남자가 한국적인 직장 문화와 위계 질서에 잘 적응한 듯 보이는 몸가짐과 말투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번져 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엿들은 듯 했다.
그리고는 라면이 많이 짠 음식이구나, 생각하면서 지나갔다.
오늘 문득, 나는 미국 음식이 너무 달아서 질색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도넛 같은 경우는 한 입 베어물자마자 기겁을 했었다.
주 원료가 밀가루보다는 설탕일 거라는 심증을 지금도 갖고 있다.
이런 것을 도대체 어떻게 먹는가,
미국에 비만 환자가 많은 것이 이런 이유로구나,
아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음식도 맞지 않는 곳에 와서,
등등 생각이 많았다.
그 친구나 나나 서로 피장파장이었다.
라면을 끓이려고 보니 몇 개는 유통기한이 2년 지났고
살아남은 것도 겨우 한 달 남았다.
라면보다는 도넛을 훨씬 많이 먹고 지냈던 거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친구도 여전히 낯선 풍토에 적응하며 살고 있을까?
이제 라면 맛은 좀 익숙해졌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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